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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에세이]봄바람

 

 

 

 

 

이른 아침 산에 올랐다가 느긋하게 내려온다. 그새 바람이 바뀌었다. 살갗을 파고드는 꽃샘바람이다. 그야말로 봄바람이다.

바람치고는 이놈의 봄바람이 조금 묘하다. 따지고 보면 봄과 바람은 엄연히 다른 의미의 명사다. 그러나 이걸 붙여서 하나의 합성어를 만들어 놓으면 그 느낌이 사뭇 달라진다. 사실 우리말에 바람이 들어가면 왠지 부정적인 감정이 많이 느껴진다. 돈바람이 그렇고 치맛바람이 또한 그렇다. 봄바람에 처녀·총각이 바람을 피우는 건 괜찮지만 늙은이가 늦바람을 피우면 패가망신을 하기 마련이다.

그중에 듣기 좋은 바람이 바로 봄바람이다. 기나긴 겨울이 가고 산천초목이 눈을 뜨는 계절이니 오죽 반갑지 않으랴. 내 나이 이순(耳順)을 넘었건만 아직도 봄바람이 불면 가슴이 설렌다. 봄이 주는 이미지는 낭만과 쓸쓸함이 함께 한다. 봄은 그만큼 여린 감정의 선을 잔잔하게 흔든다.

우리 조상들은 봄을 일 년이 시작되는 계절로 보았다. 그래서 우리는 한 해를 말할 때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고 한다. 한겨울에 입춘대길(立春大吉)을 대문짝에 써 붙이진 않는다. 반드시 봄에 써 붙인다. 아마 한 해의 시작이기 때문에 우리 선조들이 그랬던 것 같다.

우수 경칩이 지나면 산야에 봄바람이 분다. 거기에도 하늘의 뜻이 있다. 봄바람이 부는 것은 겨울 동안 잠들었던 나무와 동물들을 흔들어 깨우기 위함이다.

어찌 산촌초목에만 봄바람이 부는가? 꽃샘바람이 불면 사람들도 움츠렸던 몸을 일으키고 밖으로 나갈 차비를 한다. 그래서 마당에 있는 똥개도 봄바람엔 개구멍 드나드는 일이 바쁘다.

봄바람이 가슴을 헤집으니 부쩍 마음이 달아오른다. 괜히 어딘가로 떠나가고 싶다. 누군가가 나를 기다릴 것 같고, 꿈에 본 그 임이 어디선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다.

오라는 곳은 없어도 갈 데는 많은 방물장수도 해동이 되면 마을을 찾아온다. 방물장수는 꼭 해 질 녘에 찾아든다. 그리고 조금 여유가 있을 만한 집에 와서 밥도 얻어먹고 잠도 청한다. 그래도 감히 거절하는 집이 드물었다. 방물장수가 팔도강산을 떠돌며 들었던 온갖 소식을 다 늘어놓기 때문이었다. 그 시절엔 신문도 없었고 방송은 물론 들을 수가 없었다. 그저 호롱불 밑에서 방물장수가 들려주는 낯선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곤 했다. 어느 마을에 갔더니 처녀가 애를 뱄다느니, 과부가 눈 맞은 선머슴과 야간도주를 했다느니, 들을수록 신기하고 별난 이야기로 밤 가는 줄을 몰랐다.

이제는 그런 추억들이 지나간 전설처럼 들린다. 그 당시엔 없던 문명의 기기들이 그들을 대신하게 됐으니 이젠 방물장수도 사라졌다. 시골에 가면 오일장도 사라져 가고 보리타작하는 소리도 사라진 지 오래다. 사람이 죽으면 꽃상여 대신 검은 장의차가 들어온다. 이렇듯 시대가 변하면서 사람도 변하였다. 더불어 자연도 옛날의 그 모습이 아니다. 환경이 바뀌었다. 그러니 요새 아이들에겐 그때 그 시절 봄바람 이야기는 동화 속 얘기처럼 들릴 것이다.

산에서 내려오는 데 아직은 봄바람이 차갑다. 그러나 겨드랑이에 파고드는 이 바람기는 분명 봄바람이다. 봄바람이 부니 나도 이제 슬슬 가까운 해외라도 다녀오고 싶다. 그러나 나에게 이 봄은 春來不似春이라. 허허, 봄은 봄이로되 봄 같지가 않구나.

나는 봄바람을 안고 허우적허우적 산에서 내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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