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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의 향기]나를 따라 다닌 고양이

 

 

 

산책을 했다. 하늘은 파랗고 바람은 찼다. 붓꽃 싹이 귀를 쫑긋거리며 물가에 모여 있었다. 새는 봄을 물고 가지를 날아 다녔다. 웅덩이에 하늘이 담겨 있었다. 바람이 불자 하늘이 흔들렸다. 바람의 방향으로 쓸려갔다가 쓸려왔다. 윤슬이 반사되었다. 눈을 가늘게 떴다. 화려한 날이었다.

고양이가 물가에 죽어있었다. 봄빛을 닮은 털. 목에는 분홍 리본이 매어 있었다. 목걸이가 있으면 집에서 키우는 고양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누군가가 아끼는 고양이였겠지 싶어 가슴이 내려앉았다.

고양이는 옆으로 누워있었다. 모로 누워 잠을 자는 듯 고요했다. 하얀 네발 가지런히 한 쪽으로 모았다. 머리도 그쪽으로.

한때 내 발도 한쪽으로만 향했던 날이 있었다. 버석한 뒤꿈치 들키고 싶지 않은 날들이었다. 갈라지고 파인 날들. 자고 일어나면 똑같은 일과가 기다리고 있었고 바꿀 수 없는 현실은 틈을 내주지 않았다. 뒤꿈치는 아무도 보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웅덩이에서 따라 왔을까. 하루 종일 죽은 고양이가 발끝에 따라붙었다. 쌀을 씻어 안칠 때에도, 밥을 먹을 때에도. 책을 펼치면 책 속에 누워있었다. 분홍 리본을 두르고 네 발 가지런히 모으고.

강아지처럼 며칠 따라 다닌 말이 있었다. 누군가 했던 애매한 말. 물어뜯기도 하고 짖기도 하는 말.

다음 날은 동네를 산책했다. 날이 좀 쌀쌀했다. 웅덩이로 가는 길 쪽으로 전단지가 붙어 있었다. 고양이를 찾는 전단지였다. 전에 고양이를 키우던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고양이는 제 멋대로 나갔다가 제 멋대로 돌아오는 법이지. 그 말에 대하여 나는 ‘사람은 제멋대로 생각하고 제멋대로 해석해 버리지’라고 생각하곤 했다.

내가 아는 고양이는 싫어지면 바로 나가버리는 정 없는 동물이었다. 싫어지면 언제든 떠날 수 있는, 미련을 두지 않는 습성이 묘하게 마음에 들기도 했다. 부럽기도 했다.

바람이 차서 일찍 산책을 마쳤다. 고양이는 계속 나를 따라다녔다. 침대까지 따라와 머리맡에 누웠다. 발톱으로 베개를 긁어 놓았는지 꿈에까지 쫓아왔다. 분홍 리본을 한 노람 고양이가 물가로 비칠비칠 가는 꿈을 꾸었다.

고양이처럼 발톱으로 긁는 말이 있었다. 여기저기 상처를 내는 말. 보이지도, 만질 수도 없는 말. 나를 할퀴는 말.

이틀 후에도 동네를 산책했다. 전단지가 붙은 나무를 지나다 다시 돌아와 자세히 살펴보았다. 분홍 리본을 두른 노란 고양이가 사진 속에서 나를 쳐다보았다. 그 때서야 나를 따라다닌 고양이가 생각났다. ‘나 여기 있어’ 라고 말하는 듯 했다.

왜 미처 그 생각을 못했을까. 가슴이 두근거렸다. 나를 따라다닌 것이 이것 때문이었던 것 같았다. 물가로 뛰었다. 처음 본 그대로였다. 파란 하늘이 내려앉은 물가. 봄빛을 닮은 노란 고양이. 분홍 리본을 맨 채로 한쪽으로 모은 하얀 네 발.

고양이 주인은 사례를 하고 싶다고 했다. 거절했다. 주인은 얼마나 애통할까 싶었다. 이름이 ‘랑이’ 라고 했다. 울음이 밴 목소리로 고양이를 키우는지 내게 물었다. 아니라고 했다. 고양이든 강아지든 생명이 있는 것에 대하여 책임을 지고 싶지 않다고. 누군가의 생에 내 의지가 관여하는 일은 원치 않는다고. 누군가에 의해 내 의지가 흔들리는 일 또한 원치 않는다고. 그런 내게 ‘랑이’는 자신의 마지막을 부탁했다. 하필이면 나를.

통화를 마치고 주인은 문자를 보내왔다. 그 날이 자신의 생일이었다고. 사체를 수습할 수 있게 해주어 감사하다고. 나는 그녀에게 반려묘의 장례를 생일선물로 준 셈이었다. 내 의지 밖의 슬픈 선행이었다.

‘랑이’도 그제야 나를 떠났다. 며칠 따라다니던 말에 대하여 나도 장례를 치러주었다. 실체도 없고 확인도 할 수 없는 말에 대하여 나 혼자 지레짐작했던 일. 그렇지만 아주 아니라고는 할 수 없는 어떤 말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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