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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에세이]보리밥과 주먹밥

 

 

 

 

 

1980년 5월 그 숨 막히던 봄날에 나는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어느 날 자취방 주인아주머니가 헐레벌떡 뛰어 들어와 우리에게 울부짖듯이 소리쳤다.

“아그들아, 빨리 도망쳐야. 공수부대가 삼학도에 떨어졌당께. 학생들은 다 죽인다드라. 언능 가야.”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사지를 벗어나기로 했다. 자취방 친구를 따라 진도로 도망을 갔다. 처음 가본 진도였다. 나라에 난리가 났지만 섬은 평온했다. 시골집 툇마루에 앉아 떨어지는 석양을 즐겼다. 친구 어머니가 밭에 나가셨다가 해 떨어지고 나서야 집에 돌아오셨다. 대처로 유학 보낸 아들 친구가 왔으니 어머니 얼굴에 자랑스러운 미소가 가득하셨다.

어머니는 부랴부랴 밥을 하셨다. 나도 사실 많이 허기져 있었다. 친구와 겸상으로 밥상을 차려주셨다. 먹음직스러운 김장김치가 보시기에 한가득했고 밥이 머슴밥처럼 그득했다. 나는 허겁지겁 밥을 입안에 밀어 넣었다. 그런데 어떤 조화인지 밥이 식도로 넘어가질 않았다. 밥알이 입안에서 겉돌기만 하고 목에 걸려 넘기지를 못했다. 나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사람 사는 세상의 예의는 알만한 나이였다. 친구 어머니가 정성스럽게 지어준 밥이 아닌가? 몇 번이나 먹어보려 했지만 내 밥공기의 밥은 쉬이 줄지를 않았다.

친구는 이미 밥을 다 먹었는데 나는 반 틈도 먹지를 못했다. 원인은 꽁보리밥이었다. 쌀 한 톨 섞이지 않은 그야말로 꽁보리밥이었다. 우리 집 형편도 하층이었으니 기껏 먹는 밥이라 해봐야 보리를 기계로 눌러 납작하게 만든 납작 보리쌀이 섞인 정부미가 우리 집의 주식이었으니 보리밥이 생소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쌀과 보리의 비율이 7:3 정도로 쌀이 많았던 것 같다. 그 차이가 이렇게 클 줄은 몰랐다. 보리가 마치 흉기처럼 입안에 박혀서 식도를 타고 넘어가기를 거부했다. 보리와 보리가 서로 입안에서 바위처럼 굴러다녔다.

나는 땀을 뻘뻘 흘리며 밥을 먹었고 친구는 물론 어머니도 급기야는 당황하는 빛이 역력했다. 그럼에도 나는 밥을 다 먹지 못했다. “속이 안 좋아서 다 못 먹었습니다.” 속 보이는 변명을 했다. 다음날부터 밥상에는 보리와 쌀이 반반씩 섞인 보리밥이 올라왔다. 진도에 있는 내내 나는 죄인이 된 심정이었다.

40년이 지나 다시 그 5월이 왔다. 저녁을 먹으려고 식탁에 앉아 우연히 돌린 TV 채널에서 다큐가 방송되고 있었다. 5월 그 날 광주, 화면 속에서는 어머니가 보리밥으로 주먹밥을 만들고 있었다. 또 다른 어머니가 그 주먹밥을 아들들에게 먹이고 있었다. 전경 모자를 쓰고 칼빈 총을 든 아들이 그 주먹밥을 받아 달게 먹었다. 또 다른 아들들이 제비 새끼처럼 손을 내밀어 주먹밥을 받아갔다. 나는 목에 걸려 넘기지 못했던 그 보리밥을 광주의 그 아들은 맛나게 먹고 있었다.

그 어머니와 아들은 그날 광주에 있었고 나는 비겁하게 진도로 도망갔다. 그 어머니와 아들은 보리밥을 맛있게 먹었고 나는 어머니가 정성스럽게 만들어준 그 보리밥을 삼키지 못했다. 그래서 그 아들은 죽었고 나는 살아남았다. 목구멍 깊숙한 곳에서 시큼한 것이 치밀고 올라와 결국 나는 차린 보리밥을 먹지 못했다. 보리밥 대신 쓴 소주를 한잔했다.

‘어머니, 죄송합니다.’

‘친구야,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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