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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에세이]호박꽃

 

 

 

나는 일주일에 두서너 번 산을 오른다. 산기슭에 작은 마을이 있다.

그곳엔 집집이 조그만 텃밭을 가꾸고 있다. 텃밭에는 토마토, 상추, 고구마 같은 작물들이 심겨 있고, 텃밭 변두리 잡풀 속에는 호박넝쿨이 우거져 있다.

오늘 아침 따라 밭두렁을 타고 함초롬히 피어있는 호박꽃들이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이슬 머금은 호박꽃이 찬란하기가 그지없다.

호박은 농부가 가꾸는 곡물 중에서도 가장 손이 안 가는 작물이다. 그저 이른 봄에 아무 데나 구덩이를 파고 호박씨를 심는다. 그 위에 오물을 한 바가지 끼얹으면 그만이다. 그런데도 호박은 혼자서 뿌리를 뻗고 줄기를 뻗어 산지사방으로 퍼져 나간다.

그리고 이맘때면 어지러이 꽃을 피운다. 암꽃은 화려하고 수컷은 꼿꼿하며 단출하다. 호박꽃에도 벌 나비가 날아든다. 벌을 끌어들여도 잔잔한 꿀벌 따위가 아니다. 말벌이나 왕벌이 호박꽃을 찾아든다.

그런데 왜 호박꽃인가? 정말 호박꽃이 그렇게 못난 꽃인가? 사람이 키우는 작물 중에 호박꽃처럼 화려하고 장대한 꽃이 없다. 벼도 꽃을 피우고, 고구마도 꽃을 피우고, 보리도 꽃을 피운다. 그 모두가 호박꽃에 비하면 견줄 바가 못 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못난 여자를 가리켜 호박꽃에 비유할까?

하지만 호박이 어떤 작물이었던가. 일찍이 호박은 굶주린 백성들에게 가장 흔하게 배를 채울 수 있는 구황 작물이었다. 호박은 그늘 속에서도 자랐고, 비탈진 산자락에서도 잘 자랐다. 호강스럽게 호미질 한번 받지 않고 호박은 잡초와 더불어 자란다.

어린잎과 줄기는 밥솥에 쪄서 보쌈으로 먹는다. 애호박은 새우젓을 넣고 살짝 볶아도 좋고, 전을 부쳐 먹거나 여름날 수제비를 끓일 때 숭숭 썰어 넣으면 그 맛 또한 일품이다. 가을에 무르익은 누런 호박은 아기를 낳고 부기가 빠지지 않는 산모에게 약용으로 쓰였다. 최근에 와서도 웰빙 바람을 타고 다이어트용으로도 쓰인다.

어디 그뿐인가. 가을걷이가 끝난 호박 넝쿨은 소여물로 쓰이거나 거름으로 들어갔다. 그러니 호박의 그 어느 하나 버릴 것이 없다. 그런데도 호박이다. 심술궂은 사람을 가리켜 “호박에 말뚝 박는 놈”이라고 부른다. 무슨 일을 해서 반응이 없으면 “호박에 침 주기”라고 칭한다. 그저 만만한 게 호박이다. 그러다가도 무슨 횡재라도 만나면 그제야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었다”며 겨우 호박을 인정한다.

바로 그 호박이 눈앞에 흐드러지게 꽃을 피웠다. 커다랗게 피어있는 노란 꽃 속에 붉은 갈색의 암술이 뚜렷하고 열매가 맺으면 충실하게 키운다. 그 속에 무수한 씨앗들을 잉태시키면서 훗날의 번식을 기약한다. 종족 번식에 충실한 꽃이 바로 호박꽃이 아닌가.

나는 멈추었던 발걸음을 떼어 놓으려다 몸을 수그린다. 조심스럽게 호박꽃 서너 개를 따서 손에 잡는다. 행여 누가 보고서 호박꽃이 호박꽃을 들고 간다고 비웃기라도 할까 봐 나는 얼른 쓰고 있던 운동모로 호박꽃을 숨긴다. 그리고는 바쁘게 발걸음을 재촉한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막 잠에서 깬 딸이 호박꽃을 보고 말한다.

“엄마, 그거 호박꽃 아냐?”

“그래, 호박꽃이다.”

시답잖은 표정으로 바라보는 딸을 피해 급히 거실로 들어간다. 나는 화병에 물을 채우고 조심스럽게 호박꽃을 꽂는다. 보고 섰던 딸이 또 한마디 한다.

“엄마? 그걸 꽃이라고 꽂아?”

“암, 꽃이지. 꽃 중의 꽃이야.”

딸이 웃는다. 그러든 말든 나는 호박꽃이 꽂힌 화병을 가족들이 잘 보게 식탁 위에 올려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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