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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오늘제소리]무레사네

 

 

 

시인 이상화는 식민지가 된 조국의 아픔을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시로 절절하게 그려냈다. 암담한 시대에 조국의 산하와 선조들의 숨결이 깃든 유적지를 답사하는 ‘물에 산에’ 회 혹은 소리 나는 대로 ‘무레사네’라 부르던 모임이 있었다. ‘물에 산에’는 1990년대부터 유행한 유적답사 모임의 원조인 셈이다.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난 1926년에 당시 출판사를 운영하던 이정섭이 일요일마다 산을 오르고 유적지를 답사하는 모임을 만들었다. 오산학교 교장을 지낸 다석 류영모로부터 이 모임을 소개 받아 참여한 양정고보 지리박물 교사 김교신(1901~1945)은 1934년 8월 19일자 일기에 이런 기록을 남겼다. “이선생의 초청하는 대로 무레사네회에 따라가 보았다. 일행 남녀 9인, 창의문을 나가 사상에 관계 깊은 독박골 좁은 길 골목을 넘어, 진관사에서 잠시 쉬고 다시 석봉을 넘어 승가사에 약수를 마시고 월광을 받으면서 창의문에 돌아오다. 걷는 동안에 특히 하는 일은 없으나 자못 유익함이 많았다.”

얼마 후 김교신은 동료 교사 황욱(1895~?)과 함께 자신이 일하던 학교에 ‘물에 산에’ 회를 만들었다. 영어 교사 황욱은 암벽 등반기술을 국내 산악계에 전파한 인물이며, 그의 아들은 1948년 런던올림픽에 레슬링 대표선수로 참가한 황병관이다. 두 사람이 지도하던 ‘물에 산에’ 회는 양정산악부의 모체가 되었다. “당시 양정고보의 김교신 선생이 학교에 ‘물에 산에’ 서클을 만들고 산악부원이 주축이 되어 전국의 산과 사찰, 고분, 고적을 답사하며 그에 얽힌 역사, 연구 활동을 시작하였다.”(‘양정체육사’)

“이튿날 수십명의 어린 생도들과 함께 장충단, 남소문, 한강 도선, 압구정리, 봉은사, 양재천으로 일주하여 다시 한강을 건너면서 풍경을 감상하며 역사적 유적을 탐방하고 또한 인생을 논하다. 다니면 다닐수록 이 강산의 아름다운 풍경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우리로서 말하라면 천국의 광경도 필경 우리 서울 교외 아니면 반도의 금수강산과 흡사한 것이 아닐까 한다. 못 믿는 이는 우선 만나면 만날수록 친밀해지는 우리 강산 물에 산에 친근하여 볼 것이다.”(1934년 9월9일 김교신 일기)

‘물에 산에’를 이끌던 두 사람은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인 손기정의 후원자였다. 황욱은 제자 손기정 선수를 장남 황병관의 방에 함께 기숙시키면서 뒤를 돌봐주었고, 김교신은 “선생님 얼굴이 보이도록 자전거를 일정한 거리로 앞서 모시오”라는 손기정의 부탁을 받고 자전거에 타고 결승점을 향해 달리는 제자를 응원했던 것이다. 훗날 손기정은 이렇게 회고했다. “다른 사람은 아무도 보이지 않고 오직 김교신 선생님의 눈물만 보고 뛰어 우승할 수 있었다.”

민족의 질긴 생명력을 다룬 글을 썼다고 투옥되고 학교에서 쫓겨난 김교신은 함흥질소비료공장에서 전염병에 걸린 노동자를 돌보다가 전염병에 감염되어 45세로 운명하고 말았다. 해방을 석 달 앞둔 1945년 4월이다. 역시 중도에 학교를 그만두게 되었던 황욱은 해방이 되자 고향 평양의 평양박물관장을 지냈다.

김교신과 송욱의 이름은 오랫동안 묻혀있었다. 한국산악사를 정리한 이용대는 그 까닭을 “광복 이후 친일행적이 두드러졌던 무수한 ‘이완용’들이 산악계를 주름잡던 시절에 우리는 그를 철저히 묻어버리고 있었다”고 진단하였다. 다행히 김교신은 참된 교육자이자 기독인으로 주목을 받고 있지만 황욱은 여전히 묻혀 있다.

“침략 당한 민족이 주먹이라도 강해야 되지 않겠느냐”며 학생들에게 권투를 가르쳤던 이상화나 ‘물에 산에’를 만들어 학생들에게 조국의 산천과 유적을 답사하며 호연지기를 길러주었던 김교신, 황욱 같은 위대한 교사들이 있었기에 해방을 맞이하고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들게 된 것이다.

유월, 온 산천이 푸르다. 계절은 이토록 아름답건만 코로나로 시름이 깊다. 소비를 줄이고 자연을 아끼며 살라는 하늘의 명이 아닐까. 두 발로 걸으며 온몸으로 자연을 느끼는 시간을 자주 가져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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