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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에세이]6월의 슬픈 희망

 

 

 

세상은 온통 바이러스 질병으로 숨이 막히고 보행의 자유마저 제한되고 있다. 사랑스러운 아이들과 손자들 학교 가는 발걸음마저 불안하다. 그런데 6월의 캘린더마저 붉은빛이다. 1일의 ‘의병의 날’로 시작해 6일은 ‘현충일’ 10일은 ‘6·10 민주항쟁기념일’과 뒤를 이은 25일의 ‘6·25 한국전쟁’으로 되어 있다. 캘린더 곳곳에서 한국인의 가슴 속 신음이 들리는 듯하다.

우리 조상들은 5천 년 역사를 통해 크고 작은 외침을 천여 번 아니 정확히 931번을 당했다. 5년에 한 번꼴로 침입자들과 싸우며 죽어갔다. 성폭행은 물론 형제와 찢어져 사는 아픔을 겪으면서 굶주림에 허덕였다. 어찌 피난 갈 준비에 바쁘지 않았겠는가. ‘빨리빨리’의 정신적 습관의 근원이 되지 않았을까! 마침내는 나라를 빼앗겼다. 그리고 분단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그러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임진왜란(1592) 때는 선조가 백성을 버리고 의주로 도망을 쳤고, 병자호란(1636) 때는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내뺐다. 6·25 한국전쟁 때 이승만 대통령 각하라는 자는 서울 사람들과 국민들 몰래 자기 혼자 한강을 건너 남으로 줄행랑을 쳤다. 자기 목숨 귀한 줄만 알았던 임금과 대통령의 뻔뻔함을 탓하지 않고 그들이 버린 나라를 찾겠다고 나선 분들이 있었다. 그분들은 조정의 대신도, 벼슬아치도 아닌 이름 없는 백성들이었다. 굳이 밝힌다면 의병장이요, 지조 있는 선비요, 농사꾼들이었다. 참담한 역사의 영토 위에 태어난 작가의 한 사람으로서 이 붓을 밀고 갈 수밖에 없는 운명이 못내 한스럽다.

근현대사를 보면 군인으로서 5·16 쿠데타를 기해 권력을 쥔 박정희 대통령은 가장 측근인 신하의 총알로 죽임을 당했다. 그 뒤에도 두 사람 군인 출신 대통령과 또 다른 남·여 대통령이 법관 앞에서 형을 받고 교도소를 국립 무료숙박업소 삼아 드나들고 있다. 이러한 정치 환경 속에서 사랑하는 학생들과 희망을 잉태하지 못한 젊은이들에게 무엇을 배워야 하고 무엇을 꿈꾸어 누구와 같은 인물이 되었으면 싶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참으로 가슴 시린 6월의 문턱에서 나이 선배로서 한없이 부끄럽고 미안할 뿐이다.

이 풍진 세상 글만 읽고 살았던 선비들과 김삿갓이라면 이러한 스트레스를 어떻게 다스렸을까? 고전에서 선인들의 지혜를 엿보고 싶었다. 김삿갓이 함경도 지방을 지날 때다. 어느 부잣집에서였다. 부자는 대뜸 ‘젊은 사람이 일은 하지 않고 무슨 유람이냐?’ 하면서 다음 날 아침에도 밥 한 그릇 주지 않았다. 그런데 부자는 그냥 가려는 김삿갓에게 ‘뒤채에 정자를 지었는데 이름을 못 달았으니 정자 이름이나 지어주고 가’라고 했다. 김삿갓은 흔쾌히 승낙하고 ‘귀할 귀 자와 아름다울 나자’를 써서 ‘귀나당(貴娜堂)’이라고 하면 좋겠다고 하고 떠났다. 부자는 즉시 ‘귀나당’이라는 현판을 만들어 걸었다. 며칠 후 친구가 찾아왔다. 그는 정자 현판을 보고 누가 지어준 것이냐고 물었다. 그리고 저 현판을 거꾸로 읽어보라고 했다. ‘거꾸로?…’ 아니 ‘당나귀’ 부자는 급히 간판을 내리고 말았다.

김삿갓은 삿갓을 거룻배 삼아 정한 곳 없이 조상에게 죄 닦는 마음으로 세상을 건너고 걸었다. 그리고 부딪히는 대로 살아가면서 붓 한 자루로 벼슬아치와 세상인심을 평했다. 때로는 은유로, 때로는 풍자로, 때로는 욕설 같은 독설로 깨우침을 주었다. 6월의 슬픈 희망 삼아 김삿갓의 풍자시라도 읽으며 경건한 마음으로 지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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