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독립운동가·전쟁 영웅

2014.01.12 21:54:38

국가보훈처는 광복회·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한말 대표적인 의병장 가운데 한 사람으로 1896년 영양 청량산에서 거의해 경북·강원지역의 의병부대와 연합작전을 전개, 1905년 상소투쟁과 더불어 격문을 지어 의병 궐기를 촉구해 1914년 국권회복의 염원을 안고 동해 바다에서 투신 순국한 김도현(1852.7.14~1914.12.23)선생을 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또한 1월의 6·25전쟁영웅으로는 6·25 전쟁 당시 평양 승호리 철교폭파작전 등에서 큰 전공을 세운 전투조종사 유치곤(1927.7.17~1965.1.1)공군 준장을 선정, 발표했다.



 

 

 

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김도현 선생은 지난 1852년 경제적으로 풍요했던 집안에서 태어나 유교적 가르침 속에서 성장한 김도현 선생은 1895년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으로 유림들은 의병을 일으킬 준비에 나섰다.

김 선생은 영양읍에서 통문을 돌리고 영양지역 유생들과 의병 일으킬 일을 논의했으며, 이듬해 2월 청량산에서 의병진용을 편성해 무기를 조달하고 의병을 모집했다.

의병부대의 통합을 시도해 자신의 부대를 예안의 의병부대인 선성의진에 합류시켜 중군장을 맡게 됐고, 경북지역 7개 의병부대의 대표들과 함께 회맹의식을 갖고 승리를 기원했다.

1896년 3월 연합의진은 상주 태봉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병참부대를 공격해 상당한 전과를 거뒀고, 6월에는 민용호가 이끌던 강릉의진과 연합해 강릉 대공산성, 보현산성 및 삼척전투에서 관군에 대항해 전투를 벌였다.

이후 선생은 선유어사의 권유를 받고 1896년 10월 15일 전기의병에서 마지막으로 의병부대를 해산했다.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 체결되고 외교권이 박탈되자 선생은 을사5적의 처단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리고, 여러 나라 공사관에 ‘포고서양각국문(布告西洋各國文)’을 보내 일제의 전횡을 막는데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상소투쟁이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1906년 1월 선생은 다시 한 번 투쟁할 것을 각오하고 포군 5~60명을 축으로 의병을 일으켰으며, 광무황제의 밀칙을 받고 삼남지역의 각 군에 「의격고삼남각군문(擬檄告三南各郡文)」등을 보내어 의병 궐기를 촉구했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해 스승 이만도가 자정(自靖) 순국하자 선생은 최후의 방법으로 도해순국(蹈海殉國)을 결심했다.

1914년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동포들에게 드리는 글(與國內同胞)’과 절명시를 남기고, ‘치명수지(致命遂志)’의 길을 선택해 경북 영덕의 동해바다에서 투신 순국했다.

정부에서는 1962년 선생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했다.



불사조 정신을 보여준 '빨간 마후라' 유치곤 준장


 

 

 

‘대한민국의 공군에게 포기란 없습니다’ 1월 6·25전쟁영웅으로 선정된 유치곤 공군 준장

1952년 1월 중순 6·25전쟁 당시 승호리(勝湖里) 철교는 평양 동쪽 10㎞ 지점에 위치해 막대한 군수물자를 만주와 평양을 거쳐 중동부 전선으로 수송하는 적 후방보급로의 핵심 요충지였다.

미 제5공군 합동참모본부는 북한의 후방보급로 차단을 위해 승호리철교 폭격작전을 36회에 걸쳐 계획하고 출격했으나 실패만을 거듭한 후 대한민국 공군에게 그 임무를 부여했다.

당시 대한민국 공군은 1950년 7월 2일 최초로 F-51 전폭기 10대를 미 극동공군으로부터 지원 받아 전쟁을 수행하고 있었으며, 1952년 초까지 단지 15대의 전폭기로 작전에 임하는 열악한 환경이었다.

그러나 한국공군의 전투조종사들은 참전한 어느 국가의 공군보다 우수한 기량으로 사기충천했고, 주어진 임무를 성공리에 완수하는 투혼을 보이고 있었다.

1952년 1월 15일 세 번째 출격에 나선 우리 공군의 F-51 전폭기가 마침내 철교를 두 동강 내는 데 성공했다.

이 폭격은 유치곤 준장을 비롯한 우리 조종사들이 불굴의 투지로 완수한 빛나는 업적으로 길이 남게 됐다.

당시 유엔군은 물론 미국 대통령까지도 놀라움을 금치 못할 정도로 대한민국 공군의 위상은 크게 주목받았으며, 휴전 후에는 영화 ‘빨간 마후라’를 제작해 공군의 불사조 정신을 기렸다.

베테랑 전투조종사였던 유치곤 준장은 6·25전쟁 후 전후방 전투지휘관으로 성실히 임무를 수행하던 중 1965년 1월 1일 대구의 제107기지단장으로 재직 중 과로로 순직했다.

한편 고인의 전과를 기리고자 1964년 그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 ‘빨간 마후라’가 제작돼 상영된 바 있다.





제공=국가보원처 수원보훈지청

정리=이상훈기자 lsh@

 

이상훈 기자 lsh@kg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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