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훈처는 광복회·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경기도연합의진 이천수창의소를 결성해 중군장으로 활동하며 백현전투에서 일본군을 섬멸하고, 이후 구국회를 조직해 항일투쟁을 역설하다 아들과 함께 순국한 구연영(1864.6.20~1907.8.24)선생을 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또한 2월의 6·25전쟁영웅으로는 1951년 5월 양평 용문산 전투의 주역인 이천길(1927.3.6~2013.7.3)육군상사와 노승호(1921.3.15~)육군하사를 선정, 발표했다.
구연영 선생은 1864년 6월 20일 구철조씨의 3남으로 서울에서 출생했다.
선생의 집안은 대대로 경기도 광주군 실촌 지역에서 살아 온 유력 가문으로 엄격한 충효정신의 바탕 위에 충군애국사상을 배양할 수 있었다.
1895년 일제에 의해 자행된 을미사변과 단발령은 우리 민족의 공분을 불러일으키며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해 항일투쟁을 전개하기에 이르렀다.
선생이 참여한 남한산성의진(이천수창의소)은 전국에서 가장 먼저 편성됐으며 군사적 요충지인 남한산성을 한달 이상 점거, 서울 진공을 눈앞에 두었을 정도로 성세를 크게 떨쳤다.
선생은 의진의 중군장이 되어 1896년 1월 18일 백현(이천 널고개)전투를 압승으로 이끌었는데 이는 을미의병의 쾌거였다.
이후 원주 방면으로 이동해 수백 명의 군사를 모은 선생은 같은해 2월 25일 광주 이현에서 다시 모여 포군과 민병을 규합하고 광주의병과 연합해 남한산성을 점거했다.
선생은 이 수성전에서 중군장으로 의진의 본부가 있는 중앙을 맡아 지켰으며 일본군의 공격으로 해산되기까지 한 달 동안 일본군과 대치해 여러 차례 전투를 치뤘다.
남한산성에서 해산한 후 김하락을 의병장으로 추대해 영남지방을 향해 내려간 선생은 여주, 제천, 단양, 풍기, 순흥을 거쳐 안동에 이르러 영남의병과의 연합항전을 논의하기도 했다.
1896년 5월 한 달 동안 청송 감은리, 의성 수정사 등에서 수차에 걸쳐 일본군을 상대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1896년 여름, 고향으로 돌아온 선생은 광주군 도척면 노곡리에 정착한 뒤 기독교에 투신해 새로운 구국투쟁의 길을 모색하게 됐다.
선생은 1899년 이천 덕들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1902년 지역교회를 관리하는 권사가 됐으며, 기독교 신앙을 구국투쟁으로 승화시키기 위해 이천에서 ‘구국회’라는 애국단체를 결성했다.
이후 선생은 이천, 광주, 여주 등지를 돌며 구국회를 기반으로 군중집회를 통해 일진회의 반민족 매국행위를 성토하는 등 구국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했다.
선생의 이러한 활동에는 애국단체 보안회와 대한자강회에 가입해 활동하고 있던 장남인 구정서의 조력과 역할이 컸다.
그러나 선생은 일진회원의 밀고로 출동한 일본군에 의해 장남 구정서와 함께 체포돼 1907년 8월 24일 부자가 동시에 순국했다.
선생은 일제침략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온 몸을 던져 구국투쟁을 전개한 인물로 먼저 의병에 투신해 무장투쟁을 전개했고, 이후 기독교를 수용해 대중구국투쟁을 전개하다 순국했다.
정부에서는 1963년 선생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했다.
1951년 5월 중공군의 1차 춘계공세 당시 용문산(龍門山)은 아군의 서부전선과 중부전선을 연결하는 중요한 지역으로 양평 동북쪽 700m 넘는 고지들로 이뤄진 험준한 산과 북한강과 남한강이 주변을 흐르고 있다.
자연적으로 견고한 벽을 이루고 있어 북으로 향한 진격요선(進擊要線)이자 남으로는 방어를 위한 기지로서 아군이나 적군이나 작전상 양보할 수 없는 쟁탈 초점이었다.
이때 적은 지난 전투에서 38도선을 쟁취하자 아군의 일대 반격이 있을 것으로 내다보고 선제진공의 이(利)를 노려 16일과 17일 양일 사이에 전 전선에서 출격을 감행했다.
중공군의 계속된 투입으로 분전과 혼전은 종일토록 계속됐지만 아군은 계속 진지에서 물러나질 않았다.
그러자 적은 이날 밤 예비대인 중공군 제189사단까지 투입해 옴으로써 치열한 공방 양상은 극에 달하고 말았다.
계속된 적군의 공격으로 밀고 밀리는 전투 속에서 353고지가 중공군에게 포위를 당했으며, 치열한 전투로 인해 통신이 불통되어 제3대대는 고립됐다.
이에 제2연대에서는 제3대대와 통신이 두절되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선은 353고지 근방에서 절단된 것을 겨우 확인할 수 있었는데 그 지점은 중공군이 삼면을 포위하고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고 있는 지역이어서 통신병을 보낸 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이때 이천길 일등중사와 노승호 하사가 “저희가 그 임무를 수행하겠습니다.” 라고 결사대를 지원하고 나섰다.
“고맙다! 너희들도 잘 알고 있듯이 통신은 군대의 생명선인 동시에 작전의 맥박이다.
이 통신이 통하고 못 통하는데 따라서 수천의 생명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비극을 만들 수도 있고, 또한 사지로부터 많은 생명을 구출하고 승리를 차지 할 수도 있다.
지금 고립상태에 빠져있는 제3대대 장병들의 목숨을 구하고 353고지를 계속 확보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바로 이 중사와 노 하사의 임무완수에 달려있다.”라고 통신대장은 두 용사의 손을 잡았다.
“알겠습니다. 죽음으로써 책임을 다하겠습니다.” 그들은 적의 매복병이 잠복해 있는 곳을 피해 빗발치듯 쏟아지는 포탄과 총탄 속을 뚫고 경사와 기복이 심한 경로를 따라 유선 줄을 한 손에 쥔 채, 포복으로 전진해 갔다.
“이 중사님! 여기서 더 나가면 아군을 포위하고 있는 적진입니다. 적진이 되든 어디가 되든 간에, 우리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선 절선을 찾아가는 거다.” 이 중사는 다시 앞장서서 포복해 나가 유선을 찾아 연결함으로써 전멸위기에 있는 제3대대를 구출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함으로써 제3대대는 역공의 일선에 서서 353고지를 무사히 확보할 수 있었다.
제공=국가보원처 수원보훈지청
정리=이상훈기자 l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