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독립운동가 전쟁 영웅

2014.03.11 16:04:49

국가보훈처는 광복회·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구국의 생기를 불어넣은 선각자 전덕기(1875.12.8~1914.3.23)선생을 순국 100주기를 맞이해 3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또한 3월의 6·25전쟁영웅으로는 참전 당시 ‘어머니 저를 위해 기도하지 마시고, 함께 싸우는 전우들을 위해 기도 해 주십시오’라는 편지를 남긴 James A. Van Fleet(1892.3.19~1992.9.23)미8군 대장과 James A. Van Fleet Jr.(1925.12.28~1952.4.4)미공군 대위를 선정, 발표했다.

 

 

 

3월의 독립운동가 전덕기 선생은

선생은 독립협회 및 만민공동회에 참여해 활동하고, 상동교회 목사로 상동청년회 및 상동청년학원을 통해 을사늑약 반대투쟁을 전개했으며 신민회 창립 핵심인사로 항일구국운동을 선도했다.

1875년 12월 서울 정동에서 부친 전한규, 모친 임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난 전 선생은 9세 되던 해 부모 모두를 여의고 숯장수인 삼촌댁 양자로 어려운 시절을 보내야 했다.

17세 되던 해 당시 서울 정동에서 의료선교 활동을 하던 감리회 소속 선교사 스크랜턴과의 만남을 통해 선생의 삶은 결정적 전환기를 맞게 됐다.

스크랜턴은 1885년 의료선교사 자격으로 내한해 시병원을 설립하고 민중 지향적 선교를 전개한 인물로서 선생은 그의 민중 지향적 목회철학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시병원의 고용인으로 스크랜턴의 활동을 돕던 선생은 21세 되던 해 기독교에 입교해 상동교회 창설사업에 참여했고, 1902년 마침내 정식으로 전도사가 되었다. 선생은 열정적으로 선교활동을 전개한 결과 ‘민중 전도자’로서의 이름이 점차 교계에 널리 알려지게 됐다.

1903년 선생은 상동교회 내에 엡윗청년회를 조직해 정순만, 박용만 등과 함께 독립협회 해체 이후 흩어졌던 민족운동 세력의 재규합을 위해 힘썼다.

이후 상동청년회와 상동청년학원의 조직을 전국적으로 확대해 을사늑약 반대, 일제의 군용지 매수반대, 일진회 등 친일어용단체 반대 투쟁 등 반일구국운동을 전개했다.

또한 선생은 1897년 상동교회 안에 초등과정의 공옥여학교, 1899년 공옥남학교를 설립하고, 1904년 민족지도자급 인사들과 함께 중등교육기관인 상동청년학원을 설립해 민족교육사업을 전개했다. 상동교회와 상동청년학원의 주요 인맥인 ‘상동파’의 중심인물로서 안창호 등과 함께 신민회 창립에 주도적 역할하고 이를 통해 북간도와 서간도 지역의 독립운동 기지 확보 사업 등을 추진했다.

선생의 생애는 39년으로 비록 짧았지만 기독교 정신을 온 몸으로 구현한 ‘민중 목회자’이면서 방대한 항일민족세력을 구축해 항일구국운동에 활력을 불어 넣은 선각자로서의 역할을 다한 삶이었다.

정부에서는 1962년 선생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했다.


 

 

3월의 6·25전쟁영웅으로 선정된

 

James A. Van Fleet(미8군 대장)와 James A. Van Fleet Jr.(미공군 대위)

밴 플리트는 6·25전쟁 당시 주한 미8군 사령관을 역임한 장군이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혁혁한 전공을 세움으로써 미국 전사에서 전쟁영웅으로 추앙받는 장군이며, 특히 유명한 ‘발지전투’를 지휘한 사단장으로 프랑스에서 독일군을 몰아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장군이다.

그는 한국에 도착 직후 ‘승산이 없는 전쟁이니 동경으로 철수해야 한다’는 참모의 건의를 듣고 곧바로 ‘나는 승리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 나와 함께 하기 싫다면 당장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하며 현장의 분위기를 단번에 바꾼 명장이다.

그의 아들 지미 밴 플리트 2세도 6·25전쟁에 자원해 B-26 폭격기 조종사로 참전했다.

그러나 지미 대위는 1952년 4월 4일 새벽, 북한의 순천지역(해주 부근)에서 폭격 임무를 수행하던 중 적의 대공포를 맞아 실종되고 말았다.

그 후 그에 대한 구출작전이 진행됐지만 밴 플리트 장군은 아들에 대한 공군의 구출작업이 도를 넘지 않도록 했다.

장군은 ‘그 정도면 충분하다. 이제 구출작전을 중지하라’고 명령하고 불필요한 추가 전력 손실을 예방했다.

실종 당일 아들의 소식을 듣고도 아무런 동요 없이 자신의 임무를 수행했던 밴 플리트 장군은 그 후 가끔 아들이 실종된 지역의 지도를 물끄러미 바라보곤 했다고 한다.

지미 대위가 처음 참전을 결심했을 때 어머니에게 쓴 편지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아버지는 자유를 지키기 위해 싸우고 계십니다. 이제 저도 힘을 보탤 시기가 온 것 같습니다. 어머니 저를 위해 기도하지 마시고, 함께 싸우는 전우들을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그들 중에는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아내를 둔 사람도 있고, 아직 가정을 이루어 본 적이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제공=국가보원처 수원보훈지청

정리=이상훈기자 lsh@

 

이상훈 기자 lsh@kg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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