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독립운동가 전쟁 영웅

2014.04.09 16:17:44

국가보훈처는 광복회·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독립운동 세력의 통합에 헌신한 연병호(1894.11.22~1963.1.26)선생을 4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또한 4월의 6·25전쟁영웅으로는 참전 당시 ‘당신들의 미래를 위해 우리들의 오늘을 바칩니다.’라는 말을 남긴 영국 육군 대장 안소니 파라 호커리(Anthony Farrar-Hockley)를 선정, 발표했다.



 

 

 

4월의 독립운동가 연병호 선생

1894년 11월 22일 충북 괴산 도안 석곡리에서 태어난 선생은 민족의식이 남달랐던 형 연병환(1878~1926)의 영향을 받아 1915년 경성기독교청년회관 영어과를 다녔다. 이때 안재홍, 조용주 등과 교류하고, 조선기독청년회, 조선인유학생학우회 등을 통해 민족현실을 논의하는 등 동지적 유대를 쌓아 나갔다.

선생이 독립운동계에서 두각을 나타낸 것은 3·1운동 직후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을 결성하면서다.

청년외교단의 외교원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만주 독립군의 연계활동을 위해 1919년 말 북간도에 근거를 둔 대한정의단군정사에 합류해 그 역할을 수행했다. 또 ‘외교시보’를 발행해 국내 인사들에게 내외정세의 동향을 알리는 등 독립운동 2세대로서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1920년 ‘독립신문’에 ‘독립기념일의 말’이라는 기고를 통해 투철한 독립정신과 강인한 실천을 주장했다. 1922년에는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하며 한인사회의 대동단결을 고취하고 청년운동을 활성화하는데 힘을 쏟았다.

이를 위해 상해에서 세계한인동맹회, 유호(상해)청년회, 시사책진회 등의 조직과 참여를 통해 독립운동계의 난국을 타개하고자 노력했다.

1923년 북경대학에 입학해 중국 항일인사들과의 교류를 통해 한중연합체인 동서혁명위원회를 조직하고, 무장투쟁 노선에서 대일항전의 방략을 추진해 나갔다.

이러한 연장선에서 1925년 말 만주로 건너가 신민부에 참가했고, 블라디보스톡에 있던 국제공산당 조직으로부터 군자금을 확보하는 일을 맡아 독립군 양성 계획을 적극 지원했다.

1929년 무렵 선생은 남경으로 자리를 옮겨 한국혁명당 결성에 참가했다.

1932년 한국광복동지회, 조선혁명당, 의열단, 한국독립당 등과 함께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을 추진했고, 만주의 한국독립당과 합당해 신한독립당으로 통합 발전시켰다. 대당조직운동에도 적극 참여해 5개 정당을 통합한 민족혁명당을 창당하는 등 정당의 통합을 통한 독립운동에도 열정을 기울였다.

1933년 9월 충청도의원의 자격으로 다시 임시의정원에 참여했던 선생은 1937년 초 친일파인 상해거류조선인회장 저격사건으로 상해에서 체포돼 징역 8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30여 년간 일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독립운동세력의 조직과 통합에 헌신한 삶이었다.

정부는 1963년 선생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했다.



 

4월의 6·25전쟁영웅 안소니 파라 호커리(영국) 육군 대장

중공군은 지평리 전투에서 패배하고 서울마저 다시 국군이 수복하자 1951년 4월 총 70만이라는 대병력을 한반도에 집결시켜 대공세를 시작했다.

이는 문산에서 화천에 이르는 110㎞의 전선에 중공군 36개 사단과 북한군 1개 군단을 투입해 단숨에 서울을 함락하려는 전략이었다.

하지만 임진강 전투에서 영국군 글로스터 대대 800여 명은 중공군 3개 주력사단 4만 2천명을 상대로 사력을 다해 맞섰다.

이 과정에서 중공군의 발이 3일 동안 묶였고 한국군과 유엔군은 안전하게 철수해 수도권 북방에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하고 서울을 사수할 수 있었다.

중공군 3개 사단의 인해전술에 맞서 글로스터 대대원 800명중 41명의 전우만이 살아남은 처절한 전투였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이역만리 한국 땅에 파병돼 이름 없는 곳에서 자유와 명예를 위해 싸우다 산화한 영국 글로스터 대대의 숭고한 희생을 두고 그들은 말했다. “당신들의 미래를 위해 우리는 오늘을 바쳤다고” (“For your tomorrow, we gave our today”).

인해전술을 앞세운 공세로 비록 글로스터 부대는 와해됐고 파라-호커리는 ‘무기를 내려 놓으라’는 항복 명령을 자신의 입으로 외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었다고 생각 됐지만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다했고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고 되 뇌였다.

이 전투는 비록 졌지만 군인으로서 본분을 다해 결과적으로 서울로 신속하게 진격하는 역할을 맡고 있는 중공군 63군 3개 사단이 작전에 차질을 빚게 만들어 중공군의 사기를 크게 떨어뜨리고 중공군 남하작전을 실패하게 만들었다.

벤 플리트 미8군 사령관은 “글로스터 대대는 현대전에 있어서 단위부대의 용기를 과시한 가장 뛰어난 귀감”이라고 격려했다.

글로스터 대대는 완전히 포위된 상태에서 많은 희생을 감내하며 끝까지 ‘대영제국 군인’의 명예를 지켜낸 것이다.





제공=국가보원처 수원보훈지청

정리=이상훈기자 lsh@

 

이상훈 기자 lsh@kg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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