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의 독립운동가

2014.05.07 21:34:03

국가보훈처는 광복회·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제적 승인을 얻기 위해 대소련 외교활동을 전개, 한국독립당 중경구당 간부, 한국애국부인회 부주석, 대한민국 임시정부 선전부원으로 활동한 방순희(1904.1.30~1979.5.4)선생을 5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또한 5월의 6·25전쟁영웅으로는 참전 당시 ‘적과 함께 산화하겠습니다. 이곳을 폭격해 주십시요’라고 외치며 전사한 메흐멧 고넨츠(Mehmet Gonenc)터키 육군 중위를 선정, 발표했다.



 

방순희 선생은 1904년 1월 30일 함경남도 원산에서 출생했다.

1911년 부친을 따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 그곳에서 성장하며 민족의식을 키워나갔고, 1918년 아버지의 뜻에 따라 고국으로 돌아와 여성교육의 전당인 정신여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4년 뒤 방 선생은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가 신한촌 백산소학교의 교사가 되어 재러 한인 아동들에게 민족의식을 일깨워주었다.

그러나 소비에트의 한인학교 폐쇄 정책에 따라 더 이상 교육 사업을 할 수 없게 되자 다시 고국으로 돌아왔다.

반제국주의 혁명운동에 뛰어들어 북풍회에 가입하는 등 선전활동에 참여했으나 일제의 치안유지법 발효로 감시 대상이 된 선생은 국내에서 활동을 이어 갈 수 없게 됐다.

중국으로 망명한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의 의정 활동을 중심으로 남성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독립운동 진영에 참여했다.

분열과 갈등 속에서 혼란에 빠진 독립운동계의 통합을 위해 한국애국부인회 재건 등 여성 독립운동가의 역량을 결집했고, 독립운동계의 좌우합작 운동에 동참하여 독립의 완성과 민족국가 건설을 위해 쉼 없이 분투했다.

또 국내외 동포 여성들에게 독립운동의 주체로서 민족적 각성을 촉구하면서 남편 내조에 그치지 말고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할 것을 호소했다.

또한 임시정부의 소련 전문가로서 주중소련대사관을 상대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제적 승인을 얻기 위해 외교적 노력을 활발히 전개했다.

1944년 중국 국민당정부와 임시정부 간의 협조로 결성된 대적선전위원회(對敵宣傳委員會)를 통해 일본군으로 참전한 한인을 대상으로 한국어방송을 하면서 반일의식을 고취시키고, 일본군의 만행을 동맹국과 국내 동포들에게 알리는데 힘을 쏟았다.

방 선생은 1945년 봄에는 싱가포르 포로수용소에 수용됐던 위안부 여성 10여 명이 충칭 임시정부로 인계돼 보호받게 되자 이들의 교육을 전담하기도 했으며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가장 오랜 기간 의정활동을 전개한 여성 독립운동가로 알려졌다.

이에 정부는 1963년 선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메흐멧 고넨츠(Mehmet Gonenc)터키 육군 중위



1951년 4월 22일 터키 제1여단이 연천 동북방 5㎞ 지점에 위치한 장승천 전투에서 중공군 제60군 예하 제179사단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이는 중공군이 참전한 이후 다섯 번째의 공세로 중공군 참전 이후 최대 병력이 동원된 한반도에서의 마지막 공세이기도 했다.

오후 7시쯤에는 터키 여단이 배치된 대광리 남쪽의 장승천 일대에 40분 동안 전격 준비사격을 했고 이 포격에 포병진지와 통신시설이 피해를 입었다. 적군이 총공격을 시작했을 때, 제9중대 전방 포병관측 장교였던 메흐멧 고넨츠 중위는 다음의 메시지를 무전으로 보냈다.

“적군은 우리 중대가 주둔하고 있던 언덕을 점령했다. 많은 군인들이 교전 중에 사망했고 우리 무전병 역시 사망했다. 포병부대가 발포해야 하는 좌표를 주겠다”고 말했다.

연대 포병연락장교는 무전을 통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좌표는 당신 중대가 주둔하고 있는 지역이다.” 메흐멧 고넨츠 중위의 답은 다음과 같았다. “그렇다. 우리는 적군의 포로가 되길 원하지 않는다! 우리가 적의 손에 넘어가도록 하지 말라! 아군의 총에 죽고 싶은 것이 우리의 마지막 유언이다. 정확한 좌표를 다시 주겠다. 모든 포병부대는 이곳에 발포해야 한다!” 이 메시지 이후 그와의 연락은 끊겼다.

이러한 요청이나 일은 전사에서 듣도 보도 못한 일이었다. 포병본부의 장교들은 논의 끝에 영웅적 장교인 메흐멧 고넨츠 중위의 요청을 들어 주기로 결정했다. 포병부대의 군인들은 눈물을 머금고 중대에 발포했다.

여단의 포병대대와 사단의 모든 포병대대는 주어진 좌표 지점에 발포했다. 화포는 굉음대신 흐느끼는 듯했다. “영웅이여! 한국에서 불멸한 용감한 메흐멧 고넨츠, 당신의 불멸한 이름만 남기고 영원히 잠드소서. 당신의 명성으로 터키의 이야기는 세계에 퍼졌습니다.”

당시 16개 전투국가 중 참전규모 4번째 국가였던 터키는 참전연인원 1만4천936명 중 전사자 741명, 부상자 2천68명, 실종자 163명, 포로 244명 이었다.


제공=국가보원처 수원보훈지청

정리=이상훈기자 lsh@

 

이상훈 기자 lsh@kg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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