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독립운동가

2014.11.11 21:54:22

 

국가보훈처는 광복회·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광주학생의 항일심지에 불을 붙인 이경채(1910.4.6~1978.3.25)선생을 1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또한 11월의 6·25전쟁영웅으로는 참전 당시 ‘중대장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 고지는 반드시 우리가 점령하겠습니다.’라고 외치며 전사한 강길영(1930.9.22∼1951.9.1)해병 중위를 선정, 발표했다.



 

 

 

11월의 독립운동가 이경채선생은 광주 출신으로 1924년 광주고보에 진학하면서 식민지 사회의 현실을 직시하게 됐다.

이 시기 민족적 차별, 비교육적 처사 등에 격분해 학생들이 집단적인 등교 거부 투쟁인 동맹휴학을 전개했다.

1928년 이 선생은 광주고보 재학 당시 일제의 천황제를 비판한 문서 수십 장을 인쇄해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송정리역 등에 게시했다.

선생은 불온 문서 제작 혐의로 일제에 피체됐으나 취조가 끝나기도 전에 학교로부터 퇴학 처분을 받았다.

선생의 퇴학 처분으로 촉발된 동맹휴학이 광주고보 뿐 아니라 인근 학교로까지 확대됐다.

동맹휴학은 학교 내부의 차별에서 벗어나 식민지 통치에 대한 항쟁으로 발전했다.

이는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의 도화선이 됐다.

1931년 선생은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유학했으나 임시정부와 내통한 혐의로 모진 고문을 당한 후 1933년 상해로 망명했다.

선생은 윤봉길 의거 이후 강제 휴교된 인성학교를 다시 개교하는 데 힘썼다.

특히 한인 자녀를 위한 교재 편찬에 열정을 쏟았다.

1934년 임시정부 요인들이 활동하고 있던 항주로 이동해 한국독립당 기관지인 ≪진광≫ 간행에 참여했다.

일제에 의해 기관지 발행이 어렵게 되자 상해로 건너가 중국 국민당 군사위원회 직할의 일본연구소에 재직했다.

1936년에는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에 입교한 후 중국군에 복무하면서 항일전투에 참가했다.

이에 정부는 1991년 선생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국가보훈처는 항일학생운동과 인재양성에 헌신한 선생의 뜻을 기려 11월 13일 서울 백범김구기념관에서 공훈선양 학술강연회를 개최할 예정이다.

또한 11월 한 달 간 천안 독립기념관과 서울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선생의 생애와 독립운동 활동을 담은 기획사진을 전시할 계획이다.



 

11월 6·25전쟁영웅 강길영 해병 중위는 1930년 경북 상주군 출생으로 1949년 4월 15일 해병대에 자원입대해 소총병으로 인천상륙작전, 수도 서울 탈환작전 등에 참여해 수많은 전공을 세웠다.

그 후 해병간부후보생 제3기로 종합학교에 입교해 군사훈련을 받고 1951년 소위로 임관해 가리산 및 화천지구전투에 참가해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1951년 9월 1일에 해병 제1연대 3대대 11중대 선임장교로 강원도 양구 전방의 펀치볼 확보를 위한 전술적 요새인 924고지 전투에 참가해 중대의 선두에서 돌격전을 감행하던 중 적탄에 의해 전사했다.

6·25전쟁 초기 1년은 서울의 주인이 4번이나 바뀔 만큼 남북으로 오르내리며 극적인 전투가 벌어졌다면 나머지 2년은 50여 ㎞를 밀고 당기며 휴전에 유리한 위치를 점령하려는 고지전이었다.

1951년 7월 강원도 홍천부근에 배치됐던 미 해병 1사단과 해병 제1연대는 도솔산 전투의 후유증을 씻으며 인제 북쪽 21㎞지점에 위치한 평촌으로 향했는데 그간 내린 호우로 소양강이 범람, 도로는 침수되고 교량은 유실된 곳이 많아 차량기동에 많은 지장이 뒤따랐다.

이 무렵 대치하게 된 적은 북한군 최강부대인 제3군단 예하의 제1사단 3연대로 월령산 서북쪽에 924고지-1026고지-1055고지를 사이에 두고 견고한 진지를 구축했다.

이 지역은 북방 깊숙이 쐐기를 박는 형세가 되어 중동부전선을 북방으로 끌어올리는 관건이 되는 곳이었다.

그 중에서도 924고지는 김일성고지로, 1026고지는 모택동고지로 각각 명명해 공산군은 사수의지를 굳건히 다짐했고, 우리군은 장병들의 사기와 적개심을 불러일으켜 쟁탈하고자 했다.

924고지의 공격을 담당한 해병 제1연대 제3대대는 동북방 능선일대는 제11중대를 우일선, 제10중대를 좌일선으로 하여 공격을 개시했다.

그러나 허술할 것으로 예상했던 924고지의 우측 후방은 그 수비태세가 견고했으며, 적은 치열한 포격과 집중사격으로 저항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제11중대는 전진을 거듭하여 적진 100m 전방까지 다다랐는데, 이때 최후의 돌격을 지휘하던 중대장 육동욱 중위가 적탄으로 목에 관통상을 입고 쓰러졌다.

그러자 중대 선임장교인 강길영 소위는 쓰러진 중대장을 잡고 ‘중대장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김일성 고지는 우리가 꼭 점령하겠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선두에 선다.

그리고 그 말은 강길영 소위의 마지막 말이 되었고, 그의 장렬한 희생이 있던 다음 날 아침, 우리 군은 김일성 고지를 점령하게 된다.

이러한 공로로 1953년 3월 30일 충무무공훈장을 추서 받고 해병 소위에서 중위로 일계급 특진했다.

/제공=국가보원처 수원보훈지청

/정리=이상훈기자 lsh@

 

이상훈 기자 lsh@kg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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