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훈처는 광복회·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의열투쟁으로 일제에 항거한 오면직(1894.6.15~1938.5.16)선생을 1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또한 12월의 6·25전쟁영웅으로는 참전 당시 ‘이대로 철수하면 저 사람들은 다 죽습니다.’라며 전쟁의 참화 속에서 생사의 기로에 놓인 수 많은 주민을 구한 현봉학(1922.6.23∼2007.11.25)의학박사를 선정, 발표했다.
12월의 독립운동가 오면직 선생.
의열투쟁으로 친일세력을 응징한 오면직 선생은 황해도 안악 출신으로 양산학교와 평양 대성중학교에서 수학했다.
1919년 3·1운동에 참여한 오 선생은 1920년 조선일보 및 동아일보 안악지국 기자로 활동하다 임시정부의 군자금 모집 활동을 지원했다.
1922년 스승인 김구 선생의 권유로 한국노병회에 가입한 후 한국노병회 파견원 신분으로 중국 하남성 군관학교에 입학했다.
1931년 재중국무정부주의자연맹 상해부 및 남화한인청년연맹에서 활동했으며, 한·중·일 아나키스트가 조직한 항일구국연맹에서 기관지인 ‘자유’를 발행했다.
또 선생은 1932년 홍구공원 폭탄 투척 모의에 참가, 1933년에는 아리요시(有吉) 주중일본공사 암살을 시도했다.
1934년 비밀결사대인 한국독립군특무대에서 김구 선생의 비서로 활동하기도 했다.
선생은 1936년 한국맹혈단을 조직해 친일파 처단 및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다 일제에 체포되어 1938년 사형이 집행됐다.
이에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국가보훈처는 친일세력 처단과 독립운동 자금 확보를 위해 의열투쟁을 전개한 선생의 뜻을 기려 12월 17일(수) 서울 백범김구기념관에서 공훈선양 학술강연회를 개최할 예정이다.
또한 12월 한 달 간 천안 독립기념관과 서울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선생의 생애와 독립운동 활동을 담은 기획사진을 전시할 계획이다.
12월의 6·25전쟁영웅 현봉학 의학박사.
현봉학 의학박사는 1922년 함경북도 성진 출생으로 함흥고보와 세브란스 의전을 졸업했으며 광복 후 가족과 38선을 넘어 월남했다.
그 후 미국 버지니아주 리치몬드 의대에서 학업을 수행한 후 귀국한 현봉학 박사는 민간인 신분으로 1950년 8월초 미군의 통역관에 임명됐다.
한국 해병대의 통역을 맡게 된 그는 해병대의 입과 귀가 되어 미군과의 원활한 의사소통으로 그들의 지원을 이끌어냄으로써 낙동강전선에서 진동리 및 통영전투의 승리에 일조하는 등 생명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전장을 누비며 통역을 맡아 우리군의 승리에 기여했다.
또한 전선시찰을 위해 사령부를 방문한 미 제10군단장 알몬드(Edward M. Almond) 소장과의 운명적인 만남은 민사부 고문으로 일하면서 흥남철수작전에서 진정한 인류애를 보여 주었다.
당시 전황은 전쟁발발 한 달여 만에 낙동강까지 밀려났던 국군이 유엔군과 함께 북한군의 총공세를 막아내고 인천상륙작전과 동시에 38도선을 넘어 압록상과 두만강을 향해 북진을 계속했으나 10월 하순경부터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세는 바뀌었다.
흥남철수작전은 중공군이 원산을 점령함에 따라 해상으로 철수하는 작전으로 흥남항을 통한 해상철수만이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그러나 흥남함에는 10만 여명의 인력과 50만톤의 장비 및 물자가 선적을 대기, 작전 책임자인 알몬드 소장은 10만 여명에 달하는 미 제10군단 병력의 철수도 어려운데 민간인 철수는 생각할 수 없었다.
이에 현봉학 박사는 “적이 사방에서 쳐들어오고 있는데, 이들 민간인들이 어디로 갈 수 있겠느냐?”고 알몬드 소장을 수차례 설득했고, 그의 열성에 감동한 알몬드는 결심을 바꿔 9만8천여 명을 메러디스 빅토리호 등의 수송선으로 거제도로 오게 했다.
현봉학 박사는 전쟁의 참화 속에서 생사의 기로에 놓인 수 많은 주민을 구하는데 열과 성을 다함으로써 진정한 민족애와 휴머니즘을 보여 주었다.
전쟁이 끝난 후 그는 보건부장관 고문을 역임, 미국 의과대학에서 병리학 및 혈액학 교수 등으로 재직하면서 한미 의학계에 공헌 및 인류 의학발전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고, 2007년 11월 25일 자신이 근무했던 미국 뉴저지주의 뮐렌버그 병원에서 영면했다.
제공=국가보원처 수원보훈지청
정리=이상훈기자 l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