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 걸고 탈출… 광복군 입대
상해임시정부서 백범 김구 만나
독립운동 펼친 동지 150여명중
현재 살아있는 사람은 나 혼자
‘상처뿐인 영광’만 남아
죽기 전 평양에 가고픈 바람뿐
“목숨 바쳐 독립운동을 했지만 고향은 갈 수 없다는게 참 가슴 아프다.”
광복 70년을 눈앞에 둔 ‘마지막 광복군’의 눈빛은 간절했다. 15일 광복절을 이틀 앞두고 군포시 당정동의 자택에서 만난 애국지사 김유길(95) 옹.
‘고향이 그리워도 못가는 신세’라는 노래 가사가 자신의 처지를 말해주는 것 같다며 첫마디를 건네는 김 옹은 1919년 평양에서 태어나 젊은시절 독립운동에 몸바쳤다.
김 옹은 1932년 12세때 보통학교에 입학해 중학교까지 11년 과정을 마친 뒤 곧장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일본 구주현 대방고등상업학교를 졸업한 그는 1944년 1월 일본군 학도병으로 징집돼 중국 강소성 서주의 중지파견군 제7997부대에 입대했다.
김 옹은 “일제의 한국인 학병 징집은 전쟁 자원으로 쓰려는 목적 외에도 총알받이로 모조리 없애버리려는 술책이었다”며 “당시 일본을 위해 죽을 수 없다는 신념으로 함께 지내던 학병들과 탈출했고, 이후 안휘성 임천에 위치한 중국 중앙군관학교 임천분교 부설 한국광복군간부훈련반(한광반)에 입대해 군사훈련을 받았다”고 말했다.
한광반을 수료한 그는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찾았고, 당시 백범 김구를 만나 악수했던 벅찬 감격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는 “민족의 피는 부모형제보다 진하고 뜨거움을 느꼈다”라며 그날을 회상했다.
김 옹은 “1945년 4월 시안에 있는 미국 전략정보국(OSS·CIA의 전신)에서 낮에는 ‘압록강 행진곡’을 부르며 훈련을 받고, 저녁에 잠들 때면 해방 후 부모님을 만날 생각으로 죽음의 공포를 이겨냈다”고 말했다.
그해 8월 평소처럼 훈련을 마치고, 조국해방전쟁 투입을 기다리던 김 옹에게 일본의 항복 소식이 전해졌고, 김 옹은 광복군 국내정진군 경기도 제3조에 편성돼 국내진입을 기다리다가 광복을 맞이했다.
“독립운동을 함께 펼쳤던 150여 명의 동지 중 현재 살아있는 사람은 나 혼자”라고 말하는 김 옹은 “우리는 조국을 위해 희생했지만 상처뿐인 영광만 남았다. 독립운동의 의미도, 그들의 희생과 후손들에 대한 대우마저 잊혀졌기 때문이다”라며 “광복 70주년을 맞았지만 고향인 평양에는 여전히 갈 수 없다는 이 현실이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슬프다”라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김 옹은 “5년이 걸리든, 10년이 걸리든 우리 대에 못 이루면 내 아들 대, 손자 대에라도 반드시 1민족 1국가를 만들어야 한다는 심정으로 노력해야한다”며 “죽기 전에 꼭 통일이 돼 고향에 가보고 싶은 바람 뿐”이라고 전했다.
한편 정부는 김 옹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수여했다.
/이상훈기자 l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