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세훈의 온고지신] 작비(昨非)

2021.08.10 06:00:00 13면

오세훈 씨알재단 운영위원

▲ 오세훈 씨알재단 운영위원

 

"과거는 과오의 시간!"

요즘 기준으로 시골 면장쯤 되는 자리로 승진 전보된 하급관리가 부임 후 80일이 되었을 때다. 부하가 "상부에서 감찰 나온다 하니 의관을 정제하고 영접해야 한다. 그렇게 안하면, 머지않아 반드시 여러 가지 불이익을 당한다."고 귀뜸한다. 미관말직으로 간신히 쌀독을 채우며 살던 그 관리는 그 말에 크게 모욕을 느꼈다. 잠시 후 결연히 외친다.

 

"我豈能爲五斗米折腰於鄕里小兒"
"내 어찌 쌀 다섯 말에 그 어린 촌놈에게 허리를 굽히겠나." 폭탄선언이었다. 

 

1600년 전, 중국 동진시대의 큰 시인  도연명(365ㅡ427)이 마흔 살 때다. 그렇게 직장을 때려치고 귀향하여 그가 남긴 시가 우리 모두 감동했던 '귀거래사(歸去來辭)'다. 이 시만 보면 시인은 별문제 없이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여생을 보낸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았다. 그를 흠숭했던 당나라 시인 백거이의 '도연명의 옛집을 찾아서'라는 시에 보면, 백이·숙제가 수양산에 들어갈 때는 홀몸이었고, 도연명은 별로 똑똑하지 않은 다섯 아들을 둔 가장이었기 때문에 시인이 더 세다는 대목이 나온다. 그 長詩에서 6父子가 추위와 굶주림을 함께 겪는 장면은 볼 때마다 눈물겹다.

 

 '걸식(乞食)'이라는 시를 보면, 시인은 배가 고파서 집을 나선다. 걷고 또 걷다가 먼저 눈에 띈 어느 집 문을 두드린다. 주인에게 수줍어 말을 더듬으며 사정을 밝히고, 주안상을 받아 급히 속을 달랜다. 이어 시문을 읊으며 정을 나눈다. "죽어서라도 이 은혜를 갚겠다." 이 시의 끝 문장이다. 과장된 표현일까. '걸식'은 역사가 되었다.

 

추운 겨울, 배가 심히 고팠던 날, 따뜻한 국밥 한 그릇 얻어먹은 기억을 잊거나 고마운 마음이 약해지는 것은 일종의 패륜이다. 한신 대장군이 동네 불량배들의 가랑이 밑을 기는 모욕을 당하던 시절, 먹거리를 챙겨주던 빨래터의 아주머니(漂母)를 잊지 않고 천금을 하사한 고사(一飯千金)는 염량세태(炎凉世態)를 꾸중하는 높은 윤리이다.

 

'작비(昨非)'!
".....實迷途 其未遠, 覺今是而'昨非'...." (실은 길을 잃었다. 그러나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멀리 온 건 아니다. 이제서야 내가 '잘못 살았음'을 깨닫는다.) 어제까지는 잘못 걸어왔지만, 오늘부터는 제대로 걸어가리라! 이 문장은 나를 포함하여, 마흔 살 넘어서 긴 시간 신산 고초의 험산준령을 넘은 이들에게는 격조 높은 인생론이기도 하다. 시인은 그 모진 세상에 굴하지 않고 죽는 날까지 품위를 지켰다.김영랑의 '모란이 피기까지는'에 나오는 '찬란한 슬픔'을 느낀다. 

 

우리나라 대통령 하겠다는 자들의 지난날들도 위와 같은 품격으로 다루어져야 옳다. 전직 총리 장관도 과거는 부끄러움과 아쉬움으로 점철된 회한의 시간일 뿐이다. 정직이 정답이다. 이재명이 먼저 네거티브 중단을 선언했다. 진정이든 전략이든 잘했다. 능력과 미래로 승부하라.

오세훈
저작권자 © 경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김일광
    2021-08-25 11:58:31

    좋은 말씀 늘 감사합니다

    답글
  • 푸른사슴
    2021-08-14 11:43:05

    "어제까지는 잘못 걸어왔지만, 오늘부터는 제대로 걸어가리라!"
    가슴을 치는 말입니다.
    오늘부터라도 제대로 걸어갈 시간이 있다는 게 다행인 것 같습니다.
    해박한 지식과
    촌철살인의 한 마디에 많이 배웁니다.
    다음 글을 또 기대합니다.

    답글
  • bbikang
    2021-08-11 11:31:08

    작비의 의미를 배우고 갑니다.

    답글
  • 길벗
    2021-08-11 07:16:48

    여·야 대권 주자들간 다툼과 정책대결이 좀더 쎄게 진행되며 지난 삶의 이력과 정책역량이 잘 드러났으면 합니다.
    대통령이 지도자직 이지만 실은 시민의(국가의) 상 머슴임을 주자들은 유념 하십시오.

    답글
  • 징기스 안
    2021-08-10 20:44:21

    십수년을 우등생으로 살아 온 학생이 낙제생의 비애를 이해할수 있을까요?
    바닥을 기고 살아 온 인생은 하늘을 나는 뿌듯함을 동경하고 닮기위해 노력하지만, 천지를 종횡무진누비며 살아 온 그들은 오만과 편견에 갇혀, 착각속을 헤매입니다.
    흙탕물속 淵花의 生을 절대 잊지않고 살겠습니다.

    답글
  • 김재진
    2021-08-10 20:29:42

    '작비'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국민앞에 나서는 선출직이든 임명직이든 깊이 가슴에 새겨 두어야 할 명문이군요^^ 하나 또 배우고 갑니다 ^^

    답글
  • 구름평원
    2021-08-10 20:06:43

    안빈낙도의 삶을 살았을 거라 여겼지만 도연명의 삶이 이리 힘들었다니!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부터 제대로 걸어가리라!'
    숙연해지는군요.
    졍치인들 꾸짖기 전에 죽비로 등짝을 맞은 듯 합니다.

    답글
  • 권영미
    2021-08-10 15:56:46

    반반지은도 필보해야하는데 과거의 은혜라도 잊으면 안되지요~ 그리고 늘 과오를 반성하는 자세로 임한다면 희망이 조금은 있을겁니다. 잘 읽었습니다 ^^

    답글
  • JYK
    2021-08-10 15:32:45

    "실은 길을 잃었다. ... 이제서야 내가 잘못 살았음을 깨닫는다." 마음에 와 닿네요..

    '그러나 멀리 온 건 아니다'라는 말이 힘을 줍니다.

    항상 좋은 글 감사합니다.

    답글
  • sonamu57
    2021-08-10 13:49:47

    정직한 세상을 향하여 늘 살피며 현재를 해석하는 지도자가 그립습니다. 네거티브 선거전략을 중단하기로 결정한 후보에게 박수를 보냅니다.

    답글
더보기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흥덕4로 15번길 3-11 (영덕동 1111-2) 경기신문사 | 대표전화 : 031) 268-8114 | 팩스 : 031) 268-8393 | 청소년보호책임자 : 엄순엽 법인명 : ㈜경기신문사 | 제호 : 경기신문 | 등록번호 : 경기 가 00006 | 등록일 : 2002-04-06 | 발행일 : 2002-04-06 | 발행인·편집인 : 김대훈 | ISSN 2635-9790 경기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Copyright © 2020 경기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kg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