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웅의 하늘의 창(窓)] “천관우, 그 비운의 이름을 생각하며”

2021.08.30 06:00:00 16면

 

 

 

-사라진 이름이여

 

“언론자유투쟁사”에 뚜렷하게 박혀 있는 이름들이 있다. 송건호 그리고 리영희. 그러나 천관우의 이름을 떠올리는 이는 이제 거의 없다. 그가 누군지 아는 이 또한 드물다. 한때 질풍노도와 같이 역사의 소용돌이, 그 중심에 거대한 체구만큼이나 우람하게 서 있던 그였으나 말년의 몇 년으로 평생의 성취를 잃어버린 비운(悲運)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박정희의 3선개헌이 완료되고 이후 종신집권 음모가 진행되고 있던 1971년 4월 19일, 《민주수호국민협의회》가 뜬다. 당시 종교계의 지주 김재준 목사, 인권 변호사 이병린 변호사와 함께 언론인 천관우가 창립대표위원이 되고 이후 함석헌 선생과 법정 스님이 합류한다. 이 조직은 향후 유신체제 반대 운동의 모태로 구심력을 발휘한다.

 

1925년생이니 이때 천관우는 46세, 같이 이름이 오른 이들과 비교하면 젊디 젊은 청년이었다. 그러나 그가 29세에 한국일보 논설위원을 지냈다는 걸 떠올리면 그 세월에 이르기까지 그가 쌓아온 역사의 위치가 만만치 않았을 것임을 짐작케 한다. 그는 언론인이자 역사가였으며 권력의 탄압에 조금도 굴하지 않는 우뚝 선 산이었고 당대 언론의 우렁찬 목소리였다.

 

1974년 동아일보가 탄압을 받고 광고없는 신문발행이라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자 이듬해 1975년 1월, 그는 “동아광고 비정상상태에 대하여”라는 의견광고를 실어 언론자유는 “민주국민이 누려야 할 최저선”이라는 주장을 펼쳤다. 1971년 박정희의 비상사태 선포 이후 그는 해직되었고 이후 10년간 무직의 고난을 견뎌야 했다. 의견광고를 냈던 1975년도 그에게 이따금의 일을 의뢰받아 생기는 것 말고는 정기적 수입이 끊긴 혹독한 시절이었다.

 

 

 

-쓸쓸한 말년의 비극

 

유신체제가 무너지고 나서야 한국일보 상임고문으로 복귀했던 그는 전두환 체제가 공식 출범한 이후 이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민족통일중앙협의회”의장으로 취임한다. 함께 민주화 운동을 했던 이들 모두에게 충격이었고 그 빛나던 천관우 이름 석자가 역사의 관에 묻힌 순간이었다. 그의 곁에 운집했던 이들은 순식간에 사라졌고 그는 지독하게 쓸쓸히 지내다가 병을 얻어 초라해진 채 오늘로 치면 한참 때일 66세의 나이로 1991년 세상과 하직한다.

 

단 한 번의 잘못된 선택이 그를 빠져나오기 어려운 구렁텅이에 빠뜨린 셈이고, 평생의 명예를 회복할 기회도 없이 망각의 무덤에 들어가 버린 셈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폭력적인 정권이 어떻게 한 거대한 인물을 눈 깜짝할 사이에 몰락시킬 수 있는지를 새삼 무섭게 깨우치도록 한다. 친일로 훼절해버린 최남선, 이광수가 걸어간 길을 천관우도 뒤따른 격이니 당대의 천재적 재사를 잃어 원통하다.

 

천관우는 조선일보, 민국일보, 동아일보 세 신문의 편집국장을 거쳤고 한국일보까지 포함하면 네 신문의 논설위원을, 동아일보에서는 주필을 지냈다. 당대의 문장가였을 뿐만 아니라 권력에 붙어 진실을 왜곡하는 곡필(曲筆)을 사정없이 무찔렀고 언론사에 길이 남는 중요한 기여를 해냈다.

 

 

-천관우, 빛나던 이름

 

《신동아》는 《사상계》가 주름잡고 있던 시절에 지적 수준이 높은 대중적 월간지로 발돋움했고 여기에서 천관우의 역할은 결정적이었다. 그러던 중 1968년 이 잡지에 실린 “차관(借款)”이라는 글은 필화를 겪는다. 박정희 정권의 돈줄을 파헤친 심층보도 기사로 정경유착의 실체를 다룬 글이었다. 이 일로 중앙정보부에 끌려갔던 천관우는 결국 해임되고 만다.

 

해직의 울분을 삼키며 칩거하던 중, 동아일보는 천관우에게 1969년 3·1 운동 50주년을 기념하는 논집발간 책임을 맡긴다. 논문필자가 77명에 1000 쪽이 넘는 방대한 이 작업은 최초의 3·1 운동 연구 업적이었다. 그리고 《신동아》는 이 내용을 시리즈도 다루어 청산리, 봉오동 대첩을 비롯해서 의열투쟁과 강우규, 윤봉길, 이봉창, 김지섭, 나석주 의사, 신간회 운동과 민립대학 설립 운동 등이 대중적으로 각인되는 계기를 만든다.

 

지금이야 이런 내용을 다루는 것이 당연한 듯 하지만 당시로서는 독립운동사 자체를 언급하는 일이 어려웠던 때였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전문가도 드물었고 사회적 관심도 희박했으며 박정희가 친일세력의 토대 위에 서 있는 권력이라는 점에서도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1972년 유신체제가 시동을 걸자 동아일보는 《신동아》 12월호 부록으로 《현대한국 명논설집》을 간행하게 되는데 이때에도 천관우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여기에 수록된 글들을 보면 기라성이다. 만주지역 독립운동가들의 “대한독립선언서”,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서”, 임시정부의 “대한민국 건국강령”, 조선어학회의 “우리말 큰 사전 머리말”, 김구의 “나의 소원”, 조지훈의 “지조론” 등이다.

 

천관우는 이 모든 자료들을 직접 찾고 조사하고 골라냈는데 그 작업을 직접 지켜본 이들은 한결같이 그가 비호(飛虎)처럼 날랬다고 한다. 1973년에는 《한국사대계》 12권 발간 책임을 맡아하게 되는데 고대사로부터 근현대사에 이르는 그의 종횡무진한 실력이 아낌없이 발휘된 일이었다. 천관우는 서울대 시절 식민지 사관으로 논란이 많은 이병도의 제자였으나 정작 그를 역사로 이끈 이들은 단재 신채호. 최남선, 정인보, 안재홍 등이었다.

 

조부로부터 한학수업을 받았던 그는 5세부터 한문의 귀재로 불렸을 정도였고 우리 한문 고전 독파실력은 출중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가 대학시절 실학에 몰두하게 된 것은 안재홍과의 교분으로 알려져 있다. 하여 천관우는 대학시절 논문으로 실학의 태두(泰斗)“반계 유형원”을 써냈고 이 논문은 학술지에 실린 탁월한 수준이었다.

 

 

-실학 연구의 길

 

그렇다면 천관우에게 안재홍은 누구인가? 일제 강점기 조선의 지도자 가운데 끝까지 훼절하지 않은 인물 셋을 꼽으라고 하면 여운형, 안재홍, 송진우였다. 이 세 인물은 해방정국에서 건국준비 작업에 서로 손을 잡기도 하고 경쟁하기도 했던 사이였다. 안재홍은 《조선사 연구》를 낸 정인보 등과 함께 우리 역사 연구에 일가를 이루었고 《조선상고사감(朝鮮上古史鑑)》을 펴낸 바 있다.

 

보다 거슬러 올라가면 조선사(朝鮮史)의 부흥은 1910년대에 최남선이 만든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로부터 시작되었고 1930년대 조선학 연구 열기가 그 힘의 원천이 되었다. 최남선이나 정인보나 안재홍은 모두 비슷한 연배로 역사 연구 최전선에 섰고 바로 그 1930년대에 “여유당 전서” 발간에 함께 했던 이들이었으니 실학에 대한 지대한 관심은 당연했고 이 기운이 천관우에게 이르게 된 것이라 하겠다.

 

천관우는 이들과 함께 문일평, 최익한, 현상윤, 백남운 등의 실학 연구에 깊이 빠져들었고, 이와 함께 언론과 역사 두 병기(兵器)를 한 손에 들었던 신채호와 장지연을 가슴에 새기고 살았다.

 

그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었으면서도 여전히 부패하고 경직되어가는 봉건 조선에서 문명사의 전환기를 예감한 것이 실학이라며 이는 “근대정신의 내재적 태반”이자 근대와 민족, 그러니까 “진보와 자주 의식”이라고 압축한다. 실학에 대한 이런 천관우의 문제의식은 일제 강점기의 유산이 역사의 장애물로 엄존하고 있는 현실에서 돌파구를 찾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반계 유형원에 빠지다

 

 

그가 논문으로 쓴 반계 유형원의 역사적 위치를 그는 이렇게 정리한다.

 

“반계 유형원 한번 나와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원칙에서 그 학(學)을 체계화함에 이르러 실학은 비로소 ‘학(學)으로서의’ 존재를 확인했다 할 것이다. 그 후 성호 이익이 그 고증에 정밀을 더하여 서학(西學)을 섭취했고 다산 정약용이 그 대재(大才)를 구사하여 도달하지 않는 곳이 없는 장관을 이루매 실학은 완연히 시대사조(時代思潮)의 지배적 경향으로의 존재를 차지하게 되었다.”

 

실학이라는 새로운 역사의식의 도도한 흐름이 어떻게 형성되어 훗날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계보적으로 정리해낸 것이다. 이는 지금이야 상식처럼 되어 있으나 그가 이 논문을 발표했던 1949년 당시로서는 실학연구 자체가 황무지였던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천관우가 주목했던 토지개혁 대목을 보자.

 

“토지의 점유관계가 똑바르면 만사가 바로 선다. 전제(田制/토지제도)는 곧 민산(民産/민중의 경제생활)이다.”라는 유형원의 말과 함께 그의 현실고발을 기록한다. “부자의 땅은 경계가 서로 잇닿아 끝이 없고 가난한 이는 송곳 하나 세워놓을 땅도 없게 되어 빈익빈(貧益貧) 부익부(富益富)로 급기야는 모리배들이 땅을 모조리 갖게 되고 백성들은 식구들을 이끌고 떠돌아다니다가 머슴살이로나 들어간다.”

 

그래서 토지개혁이 필요한데, 유형원은 “국가의 대계를 위해서는 극형으로 임하는 한이 있더라도”해야 한다며 균전제(均田制)를 주장, 농민들에게 땅이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혁명적 발상과 주장이 아닐 수 없다. 천관우는 통일된 임시정부 구상을 담은 모스크바 3상 회의의 구체적인 내용을 알지 못한 채 반탁운동을 했던 터라 흔히 우익보수로 분류되는데 이렇게 보자면 그의 보수는 민족사적 결기에 뿌리를 둔 보수였다.

 

사실 그의 내면에는 도리어 실학이 던진 혁명적 사유가 꿈틀대고 있었으니 지금의 틀에서 진보라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다만 송건호나 리영희와 비교할 때에는 그 진보성의 정도는 달리 평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언론자유, 그리고 천관우

 

말년의 선택과 고독은 이 비운의 천재가 마주한 세상이었다. 드높던 명성은 진흙탕에 굴렀고 그의 자취는 온 데 간데없다. 이럴 때 역사학자 이만열 선생의 말을 떠올린다.

 

“당신은 선생이 10여 년 간 군사정부로부터 조직적으로 괴롭힘을 당하고 있을 때 따뜻한 위로와 격려를 전한 적이 있던가? 선생이 그리 좋아하시던 술 한전 대접한 적 있던가? 아니라면 그 입 함부로 열지 말고 다무시게.” 군사정권이 가한 폭력이 시대의 인물을 대접한다면서 밟아버린 역사를 깊게 짚어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거다.

 

아프다. 이만한 재사를 보기 어디 쉬운가? 그의 헌신이 언론자유투쟁사를 얼마나 견고하게 만들었는지를 아는 이들 모두가 그리 여길 것이다. 옹호해보자면 그는 노골적으로 전두환을 찬양한 바 없고 학병권유 연설에 버금가는 활동도 없었다. 그저 “민족통일중앙협의회” 의장으로 아무 말 없이 지내다가 암과 우울증을 안고 운명했을 뿐이다.

 

다시 언론자유가 화두다. 그러나 이번의 화두는 부당한 권력과 맞선 언론자유의 서사가 아니다. 난폭해진 언론의 폭력으로부터 지켜내려는 시민의 자유와 권리가 그 중심에 있다. 기묘한 역사의 역전(逆轉)이다. 천관우는 이런 세태를 보며 뭐라 할까?

 

다시 들쳐 본다. 언관(言官)과 사관(史官)의 임무를 함께 하려 진력했던 그의 글들과 생각을. 이렇게 살았던 그마저도 홀연 어느 날 허망하게 꺾였다. 그리고 그의 이름은 민주투쟁의 역사에서 지워졌다. 그래도 다시 들쳐본다. 조선사의 쟁쟁한 목소리들을 캐내 세상에 보인 천관우를. 그저 흙을 덮고 묻기에는 그의 이름이 가진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다.

 

 

그러면서 다시 다짐한다. 천관우의 비운이 되풀이되는 세상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을. 언론자유에 역사의식과 실천이 탄탄하게 장전되는 걸 기원하며.

 

 

 

 

김민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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