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웅의 하늘의 창(窓)] “도덕정치(道德政治), 인간혁명의 길”

2021.10.25 06:00:00 16면

-정몽주의 주체의식 상실

 

역사적 인물에 대한 이해나 평가는 미처 짚지 못한 것들이 있을 때 어느 한 단면이 전체로 전해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지금의 현실에서도 인물평이라는 것은 이런 한계에 갇히는 수가 적지 않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미처 몰랐던 진면목이 드러나면 감탄하는 경우가 생기는가 하면 그와는 반대로 놀라 아연실색(啞然失色)하는 경우 또한 있게 된다.

 

가령 고려(高麗)의 국체를 지키면서 개혁하겠다는 정몽주는 조선 개국에 협력하지 않자 선죽교에서 격살당한 뒤 절조(節操)있는 충신의 표본으로 역사에 기록된다. 그런데 그가 원명(元明) 교체기에 명나라 옷을 입고 명나라 말을 써야 한다고 주장했던 지극히 사대주의적 인물이었다는 점을 안다면 우리의 판단은 좀 다르게 된다. 그는 당대의 대유학자임에도 주체적 자아에 대한 각성이 세워지지 못했던 것이다.

 

고려말은 몽골 제국의 본령(本領)인 원과의 관계에서 유라시아 교역로가 제공하는 문명의 개방성과 자유로움을 누리면서 나름의 주체성을 지켜내고 있었던 시기였다. 그러나 한족(漢族)의 입장에서는 이민족(異民族)인 몽골의 지배가 퇴조기에 들어서자 유학의 본가가 다시 부흥했다고 여기고 중화주의(中華主義)에 매몰된 지식인들이 등장하게된다.

 

당시 고려 유학자들이 대체로 그런 경향에 기울기는 했으나 이 가운데 정몽주의 경우는 너무 나가버린 셈이었다. 이성계 세력이 커지는 조짐이 일자 그가 해주에서 사냥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중상을 입었다는 소식에 이걸 기회로 공양왕에게 상소, 제거작전을 폈던 정몽주였다. 물론 실패했으나 만일 그가 성공했고 사태를 주도했다면 고려말은 어떤 세상이 되었을까 미루어 짐작하게 된다. <훈민정음(訓民正音)>같은 것은 꿈도 꾸지 못하게 되었을 것이다. 게다가 훈민정음은 한문이 주도하는 세상에서 백성들의 소통능력에 제한받는 것을 풀어주려했던 것이 아닌가? 이를 반대한 최만리의 정신계보가 바로 정몽주에 있던 셈이다.

 

-광개토왕비의 비문에는...

 

 

고려 중기의 김부식이 남긴 <삼국사기>는 중국의 역사에 머리를 굽혀 만든 책이라는 점에서 우리 역사에 대한 주체적 의식이 없다고 단재 신채호의 신랄한 비판을 받았다. 이렇게 보면 의식의 독자성을 지니고 세상을 바라보는 일은 매우 중요한 역사의식이 된다. 그렇지 못하면 남의 눈으로 자신을 보고 판단하는 식이 되기 때문이다. 단재는 이런 까닭에 <삼국사기>를 붙들고 있는 시간에 광개토왕비가 있는 집안현을 돌아보는 것이 훨씬 낫다고 강조한 바 있다.

 

광개토왕비는 대체로 비문(碑文)의 일부를 일본이 조작하고 왜곡한 바에 관한 논쟁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러나 비석 사면에 걸쳐 빽빽이 쓰인 글들은 고구려 역사의 방대한 내용을 압축하고 있다. 웅장한 역사를 아로새긴 것이다.

 

그 문장 가운데 고구려의 통치이념에 대해 원조 주몽 다음 대인 유리왕이 “이도흥치(以道興治)”했다는 구절이 나온다. “도(道)”로써 정치를 일으켰다는 뜻이다. 이런 문장이 쓰인 시기는 광개토왕비를 세운 장수왕 때인 414년으로 유학 교육을 전문으로 하는 태학이 세워진 소수림왕 2년인 372년에서 그리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기원전 37년에 출발한 고구려 역사가 이미 그 초기에 “도(道)”라는 사유를 바탕으로 정치를 했다고 기록한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강력한 군사력으로 영토를 확장하는 것에만 몰두한 나라로 여길 수 있으나 그 안에는 사상, 의식, 도덕, 윤리와 같은 덕목을 중심에 놓는 정치공동체의 존재가 있는 것이었다.

 

이 ‘도’가 “유가의 도(道)”인지 “도가(道家)의 도”인지를 판별하는 문제가 남아 있기는 하나 그 어떤 경우이든 “하늘의 뜻에 따라 사람이 살아갈 도리”라는 뜻에서는 차이가 그리 없다 할 것이다. 정치의 핵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6세기 말의 신라 진흥왕 순수비의 하나인 황초령비(黃草嶺碑)에는 왕의 임무에 관해 다음과 같은 구절이 적혀 있다. “수기이안백성(修己而安百姓)”자신의 덕을 갈고 닦아 그걸 바탕으로 백성들을 편안케 한다는 뜻이다. 자신을 수련의 대상으로 삼아 덕을 높이고 주체적 자아를 세운다는 의미를 가진 “수기(修己)”는 유학의 기본개념인데 그 목적은 백성을 위한 자세를 기르는 것에 있음을 보여준다.

 

자신을 가리키는 “기(己)”를 주목하는 이런 생각은 인간의 자아, 그 주체적 존재의 존엄한 품격에 대한 관심사를 말해주는 동시에 그것은 곧 타자의 행복과 직결되어 있음을 아울러 일깨우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신라의 문관 이름에는 “은솔(恩率)”, “덕솔(德率)”이라는 것도 있으니 백성을 자비와 사랑으로 이끌거나 덕으로 이끄는 지도력을 얼마나 중시했는지를 알 수 있다.

 

물론 말은 이렇게 내세우지만 현실정치에서 권력다툼에 그런 덕과 도가 무너지는 일은 다반사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노력을 정치의 중심에 세우려했다는 것은 그 의의가 매우 깊다. 역사를 더 거슬러 올라가면 유학의 영향이 아니더라도 우리 민족사의 정신세계가 애초 이렇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산해경>의 증언

 

 

19세기 말 은허(殷墟)에서 발견된 갑골문(甲骨文)은 신화로만 알고 있던 은(殷)과 주(周)의 역사를 입증해 기원전 1200년 정도의 시기에 해당하는 은과 주에 대한 기록을 남긴 기원전 4세기에 나온 <산해경(山海經)>이 황당한 문건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했다. 바로 이 산해경에는 해동(海東)의 동이족 국가(고조선)가 군자국(君子國)으로 “호양부쟁(互讓不爭)”의 정치와 습속을 가지고 있다고 기록해 놓았다.

 

 

“군자의 나라”라는 것은 성인(聖人)의 도(道)를 가진 나라라는 뜻이고 “호양부쟁”은 서로 배려하고 이해관계를 놓고 다투며 싸우지 않는 품격이 있다는 의미다. 대단한 칭찬인데 전쟁으로 날을 지샌 전국시대(戰國時代)의 폭력에 시달렸던 중국역사와는 다른 모델에 대한 감동이라고 할 수 있다.

 

 

퇴계(退溪) 이황과 고봉(高峯) 기대승 사이에 오간 편지는 조선 유학 사상사에서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 논쟁”의 최대 명장면이었다. 나이 26년의 차이를 넘어 서로에 대한 존경과 격조 있는 문답을 성실하게 나눈 서간(書簡)에는 서로에 대한 염려와 자신의 부족함을 끊임없이 토로하고 있다. 이와 함께 퇴계가 고봉의 의견을 높이 존중하는 동시에 을사사화 등 비정한 정치를 이미 경험해보았으며 대제학까지 오른 그의 경력에 따른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퇴계는 이미 젊은 시절에 명성이 자자한 고봉이 벼슬길에 올랐다가 여러 비방과 논박에 괴로워하고 진퇴를 고민할 때 이런 편지를 보낸다.

 

“선비들은 벼슬에 나아가고 물러서는 도리를 잊어버리고 나이가 들면 벼슬에서 물러나는 예도 없어졌으며 허울뿐인 이름의 허물은 더욱더 깊어지고 심해져 물러날 길을 구하기가 갈수록 더욱 험난해질 줄도 몰랐습니다.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나아갈 수도 물러설 수도 없게 되었으며 비방하는 논의는 산과 같이 많아 두려운 생각이 듭니다.”

 

사화를 겪은 시대의 비탄한 사정을 고백하는 동시에 자신도 이런 시류에 휩쓸려 힘이 들었다면서 그래도 자신을 잘 지켜내기 위해 애쓰고 있다며 기대승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대는 빼어난 기상과 동량의 재질을 갖추어, 벼슬길에 나오기 전에는 멀고 가까운 곳에 이름이 퍼져 나갔었고, 벼슬길에 나오자 온 나라의 관심이 그대에게 쏠렸습니다.”

 

-고봉 기대승에 대한 퇴계 이황의 조언

 

 

고봉 기대승의 명성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러나 젊은 재사가 자칫 정치의 혹독한 가시밭길에서 상처받고 넘어질까 걱정이 되어 자신의 조언을 길게 이어나간다.

 

“저는 일찍이 우리나라의 선비 중에 조금이나마 뜻을 가지고 도의(道義)를 좇은 사람들 거의가 세상의 환란에 걸린 것을 이상하게 여겼습니다. 이것은 비록 땅이 좁고 인심이 박한 까닭이기는 하지만 역시 그들 스스로를 위한 계획이 미진했기 때문에 그러했습니다. 이른바 미진했다 함은 다름이 아니라 학문을 이루지도 못했으면서도 자신을 높이고 시대를 헤아리지 못했으면서도 세상을 일구는데 용감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실패한 까닭이니 큰 이름을 걸고 큰 일을 맡은 사람은 반드시 경계해야 합니다. 그러니 나의 배움이 완전하지 못한데 어찌 성급하게 나라를 다스리는 일에 책임을 맡겠는가 해야 합니다. 언제나 빼앗을 수 없는 의지와 꺾을 수 없는 기개와 속일 수 없는 식견을 지녀야만 합니다.”

 

이 편지에 기대승은 “소경과 귀머거리를 보고 듣게 해주셨습니다. 나를 낳아주신 분과 같으니 뼛속 깊이 새겨 죽을 때까지 따르겠습니다. 제게는 크나 큰 행운입니다.”라고 답한다.

 

이 둘 사이에 오가는 편지에는 앞서 잠시 언급했듯이 자신의 허물을 거리낌 없이 밝히면서 그 허물에 대한 질책을 듣기를 간절히 바라는 내용들이 담겨 있다. 퇴계는 고봉에게 벼슬길이든 학문의 길에서든 자신의 허물에 대해 듣기를 즐거워하라고까지 한다. 이런 태도가 윗사람 또는 권력자에게 부당한 일에 대해 입을 열어 말하는 “간(諫)의 철학”이 되기도 한다.

 

-수기치인(修己治人)의 도(道), 인간혁명

 

여기에는 상대에 대한 비방이나 멸시 또는 다툼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예와 신의를 가지고 정성을 다해 정도(正道)에 대해 말하는 것이며 이를 듣는 쪽도 견디기 힘들지라도 성실하게 경청하면서 자신을 돌아보는 노력을 기울이는 것을 전제로 한다. 만일 신하가 성의로 간(諫)하는데 이에 대해 격노하고 핍박하면 성군의 자격이 없다는 판명을 받게 되고 신하도 군왕의 격분을 살 경우 자칫 위태로울 수도 있다.

 

그러나 하늘의 뜻을 받들어 사람의 도리로 정치를 일으키는 “이도흥치(以道興治)”와 자신을 끊임없이 닦아 백성을 편안케 하는 “수기안민(修己安民)”의 도를 실현하려면 이런 인간성의 완성을 향해가는 길을 가는게 마땅한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정치는 그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사람다운 사람이 되는 길을 만들어가는 공동의 노력이 된다. 저 혼자 잘났다고 뻐기며 세상을 휘어잡고자 할 일도 아니며 현실정치는 도덕이나 윤리와는 달라, 하면서 자신과 공동체 전체를 탁하고 추한 욕심의 구렁텅이로 빠뜨려서도 아니 될 일이다. 마키아벨리가 도덕과 정치, 인간의 덕과 권력을 분리하면서 근대정치의 권모술수와 잔혹하고 폭력적인 사태가 정치에서는 당연한 듯 여겨지게 되었지만 그건 모두를 패망으로 이끌게 될 뿐이다.

 

우리의 오랜 정치사상의 중심에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이라는 도덕정치가 있다. 그 본질은 자신의 주체성을 확립하는 끊임없는 노력과 사람의 도리와 후덕한 품격을 지니며 의(義)에 자기 자신을 거는 덕인(德人)을 향한 인간혁명의 중단없는 과정과 정치가 하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 자들이 정치의 중심에 서게 되면 “인간퇴화”의 현실이 벌어지게 된다. 우리가 지금 현실에서 목격하고 있는 바다.

 

정치는 매일 일어나는 인간교육이자 사회혁명이다.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능력이기도 하면서 그와 동시에 인간의 품격이 높아지는 경험을 나누는 도덕적 축제의 현장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은 정치는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을 지배하는 궤변이 통치이념이 되는 비극이 일상이 된다.

 

선조가 붕당정치의 폐해를 해결해보고자 이이 율곡을 이조판서에 임명하려 하니 이이는 이미 어느 한쪽에 기울었다는 평판이 퍼진 자신이 나서는 것은 옳지 않다 여겨 억울한 마음이 있긴 해도 이렇게 답하며 물러나기를 간청한다.

 

“천은(天恩)은 망극하오나 움직이면 허물이 따르오니 전원(田園)으로 돌아가고자 하나이다.”

 

진퇴를 모르고 인간혁명의 정치를 생각하지 못하는 정치는 교육부터 망가뜨린다. 정치는 그 나라의 교사(敎師)다. 조롱과 멸시를 받는 정치는 우리가 강제로라도 퇴장시켜야 한다. 그게 우리의 권리다. 우리 자신의 수기(修己)를 위해서라도.

 

 

 

 

 

 

 

 

 

 

 

 

 

 

 

김민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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