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행 칼럼] 어떤 유언

2022.01.06 06:00:00 13면

 

지난해 말 듣도 보도 못한 유언을 접했다. "나를 포함해 사람 개개인이 하느님이란 걸 깨달았으니 여한이 없다. 담백하게, 단순하게 이별할 때가 되었다. 숨 떨어지면 곧바로 화장을 해주기 바란다." 이게 다였다. 생에 대한 미련이나 슬픔이 엿보이지 않는 유언 앞에 그저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신문 기자 출신의 유언 당사자는 성품 자체가 정의로운 사람이었다. 기성 언론에 몸담고 있으면서도 언제나 '삐딱'했다. 부당한 취재지시는 일언지하에 거부했다. 반면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으려고 애썼다. 신입 기자 시절에 대선배인 그를 학생운동권 출신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학생운동권과 거리가 멀었다. 어떤 이데올로기를 거명하거나 궁금해 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다만 그는 조금이라도 옳지 않은 일을 보면 '그건 아니다!'고 소리를 높였다. 일테면 기자실을 통해 정부 부처나 지자체, 기관 등이 기자들에게 해외여행이나 각종 혜택을 부여할 때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선을 그었다. 지금은 개선이 많이 되었지만 당시에는 공짜 여행 등 관이나 권력의 기자들에 대한 특혜가 적잖이 주어졌었다.

 

그는 이즈음 유행하는 '강약약강'(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과 정반대인 '약약강강'한 사람이었다. 어떤 이론을 접해서가 아니라 천성이 그랬다. 상식과 합리에 따라 기사를 쓰고, 일상을 사는 그에게 진보니 보수니 하는 말은 허위의식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이른바 586세대로서 우리가 신봉하는 가치들이 편협한 것일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리어왕처럼 세상이 나나 우리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착각한 것에 대한 뼈아픈 자기성찰이었다.

 

오래 전 몇몇 후배들이 그의 회갑을 맞아 기념패를 증정했는데 눈에 띄는 구절은 "선배는 대책 없는 낭만주의자"라는 것이었다. 어떤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운 그의 기자 정신을 에둘러 표현한 것이다. 그는 어떤 위험도 피하지 않고 맞붙었다. 끊임없는 부딪힘 속에서 숱하게 약자들을 만났다. 인간은 곧 하느님이라는 통찰은 그들 속에서 얻은 게 분명하다.

 

누가 "인간 개개인이 하느님이란 것을 깨달아서 더 이상 (삶에) 여한이 없다"고 감히 유언을 할 수 있을까? 이런 경지는 가늠하기 쉽지 않다. 사람들 속에서 지지고 볶고 살면서 가장 작고 약한 것들을 고통 속에서 끌어안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것이라고 추측할 뿐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죄와 벌』을 통해 아주 사소한 것에서 영원성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영원이라고 하면 대부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규모를 떠올린다. 정말 거대하다! 왜 항상 그래야만 하는가? 허름한 시골집의 욕실을 상상해 보라. 곳곳에 검은 얼룩이 묻어 있고 구석마다 거미가 득시글거리는 지저분한 욕실....바로 그런 곳에 영원이 존재한다. 내가 생각하는 영원은 이런 것이다."

 

선배 기자의 유언은 영원성을 증거하는 기록이 아닐까? 사회가 하찮은 사람들로 여긴 약자들을 평생 사랑했기에 그 속에서 하느님을 보았다는 것은 영원성을 보았다는 고백일 터이다. 우리는 미리 유언을 쓰게 된다면 어떻게 쓸까? 이처럼 담백하고 담대한 유언을 쓸 수 있을까? 이는 우리가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지 묻는 새해의 알찬 선물이 아닐까?

이건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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