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수의 관규추지(管窺錐指)] 새해 바람

2022.01.07 06:00:00 13면

 

한국 바둑이 변두리 취급받던 1989년, 조훈현은 제1기 응씨배에 단기필마로 출전해 우승한 뒤, 이렇게 말했다.

 

“나는 할 만큼 했다. 뒷일은 창호가 알아서 해주겠지.”

 

새해 벽두부터 이 말이 떠오른 것은 올해 내 큰아이가 결혼 예정이라서다. 한참 푸릇하던 나이엔 이런저런 희망과 포부가 없지 않았지만, 이제 나이 예순에 남은 바람이라곤, 그저 탈 없이 가장 노릇을 잘 마치는 것뿐이다. 둘째는 아직 학업 중이지만, 큰애 결혼 날짜를 잡고 나니 마음이 조금 놓인다. 십수 년 전에 돌아가신 선친께도 얼마간 빚을 갚았다 싶고.

 

김규항은 최근 우리 사회가 당면한 문제 본질은 자본의 무분별한 확장이며, 노동이 차지하던 최소한의 몫조차 자본이 빼앗고 있어서, 우리 아이들이 직업을 갖고 집을 사고 가정을 꾸려나가는 게 불가능해졌다고 말했다. 우리 잘못으로 젊은이들이 절망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다시 김규항의 말을 빌리자면, 케인스주의와 같은 수정자본주의조차 삼켜버리고 자본의 탐욕스러운 확장만 남은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한계 때문이다.

 

내가 큰아이 결혼 날짜를 잡고 나서 안도했듯, 내 아이도 자식을 낳아 키우고, 그 아이가 다시 아비에게 결혼식 날짜를 알릴 때 안도하길 바란다. 이게 바랄 수도 없는 꿈은 아니지 않은가. 윤석열의 처참한 무능과 부인과 장모가 저지른 여러 범죄가 드러나면서 이재명 후보 지지율이 올라가고 있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시장이 원한다면 그린벨트도 풀어서 집을 짓겠다는 이재명식 실용주의가 아슬아슬한 것도 사실이다. 그는 자본주의를 조금 손보아서 투명하게 운영하기만 하면, 부동산 시장도 안정되고, 코스피 5000시대가 쉽게 올 수 있다고 말한다. 과연 그럴까. 한국 자본주의는 고치기만 하면 제대로 작동해서 우리 삶과 우리 자식들의 삶을 온전히 담보할 수 있을까. 나는 약간 회의적이다.

 

그러나 지금은 의심할 시간이 아니다. 아쉽고 부족해도 민주당 정권 연장을 통해 조중동을 위시한 수구 언론과 입법, 사법, 행정부 곳곳에 깔린 기득권 세력들을 대대적으로 개혁해 나갈 때다. 사회 개혁이 돌이킬 수 없는 단계에 돌입해야, 비로소 재벌(자본)이 사회적 대타협에 나서게 될 것이다. 이재명 아니라 세상에 다시 없는 자가 대통령이 된다고 해도, 그이 혼자 힘으로 기득권과 체제 개혁이 가능할 턱이 없다.

 

조훈현은 응씨배 이후로 이창호에게 타이틀을 모두 빼앗겼지만, 2002년 삼성화재배에서 우승하면서 화려하게 부활했다. 그는 이창호에게 뒷일을 부탁한다고 말했지만, 뒷짐 지고 물러나 있지 않았고, 그 결과 한국 바둑은 든든하게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 가장의 소임을 다하고 싶다는 희망이 어리석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소크라테스가 죽기 직전에 닭 한 마리 빚을 갚아달라고 했고, 퇴계 이황은 매화나무에 물 주라고 했지만, 그 유언이 가볍게 들리지 않는 것은, 그들이 평생에 걸쳐 지켜온 신념과 언행 때문이다. 우리는 일상을 지키기 위해 싸워야 하고, 그 싸움은 올해도 내년에도 이어질 것이다. 싸움을 계속하기, 그게 새해 내 작은 바람이다.

한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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