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갑의 難讀日記(난독일기)] 틀려줘서, 고마웠어요.

2022.01.11 06:00:00 13면

 


이해하기 힘들 때가 있어요. 교통법규를 제멋대로 무시할 때 말이지요. 그렇다고 멱살다툼을 할 순 없잖아요. 무시하는 그도, 지켜보는 우리도, ‘어른’이라는 명찰을 달고 있으니까요. 화가 나서 경적을 울려대는 사람도 있긴 했어요. 바쁜 일이 있거나 성마른 성격 탓이었겠지요. 생각해보면 그럴 만도 했어요. 다른 차로와는 달리 오른쪽 바깥 차로만 꽉 막혀 있었으니까요. 사고가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요. 앞서가던 차들이 차로를 변경하며 추월하기 시작했어요. 급할 것이 없는 우리는 차로를 고수했지요. 장례식장으로 조문을 가는 중이었거든요.

 

대여섯 대의 앞차가 추월해서 나간 뒤에야 문제의 트럭이 꽁무니를 드러냈어요. 짐칸에 채소를 가득 실은 1톤 트럭이었어요. 사고가 있었거나 고장이 난 것 같진 않았어요. 비상등을 깜빡이며 거북이걸음을 하고 있었으니까요. 문제는 느려도 너무 느리다는데 있었어요. 걸어가도 그것보다 느릴 순 없었으니까요.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지.’ 싶을 즈음 이유를 알게 되었어요. 비상등을 켜고 기어가는 트럭 앞에는 허리 꾸부러진 할머니가 있었어요. 손수레를 밀고 가는 할머니였어요. 할머니의 손수레에는 차곡차곡 쌓은 빈 박스가 한 짐이었어요.

 

비상등을 켜고 기어가는 트럭의 속도는 손수레를 밀고 가는 할머니의 속도와 정확하게 일치했어요. 비상등을 켜면서까지 기어가는 트럭의 느림은, 그러니까 트럭 운전수의 의도적인 느림은, 꾸부러진 허리로 땅만 보며 전진하는 할머니의 뒷모습을 쏙 빼닮아 있었어요. 어쩌면 그 느림은, 수만 걸음을 내디뎌야 저물 수 있는 할머니의 하루 같은 것일지도 몰라요. 그 느림이, 내 눈에는 작은 수레바퀴를 뒤에서 밀어주는 큰 수레바퀴처럼 보였어요. 작은 수레바퀴의 노곤함을 함께 나눠지는 큰 수레바퀴의 듬직한 어깨 같았다고나 할까요.

 

할머니의 손수레가 도로를 벗어나 골목으로 접어들 때까지, 뒤 따르는 트럭의 의도적인 느림은 계속되었어요. 할머니의 손수레가 도로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을 확인한 뒤에야 트럭은 비상등을 끄고 느림에서 벗어났어요. 트럭 꽁무니를 따르던 우리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어요. 문상을 마치고 난 사람처럼 숙연한 표정들이었지요. 몇 분 전까지만 해도 혀를 차기 바빴던 사람들이 말이에요. 운전도 못하면서 차는 왜 끌고 나오느냐며 손가락질도 했을 걸요. 부끄러움과 함께 고마움이 고개를 들었어요. 표현하기 힘든 묘한 고마움이었어요.

 

그래서였을까요. 언젠가 신문에서 읽었던 기사 내용이 문득 떠올랐어요. ‘주문을 잘 못 알아듣는 식당’이라고 했어요. 일본 도쿄에 있었다지요. 주문과 달리 엉뚱한 음식을 서빙해도 화내는 손님이 없다고 했어요. 종업원들 모두가 치매를 앓고 있다는 걸 손님들이 잘 알고 있었으니까요. 그 식당은, 치매 환자와 지역사회의 공존을 위한 시범사업이었다고 해요. 고정관념을 무너뜨리는 기사가 아닐 수 없었어요. 새해에는 그런 일이 많았으면 좋겠어요. 주문이 틀려도 환하게 웃는 손님처럼. 의도적으로 느림을 선택한 트럭 운전수처럼. 틀려줘서, 고마운 사람들이 많았으면 좋겠어요.

 

다시금, 틀려줘서 고마웠어요.

 

고향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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