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규 칼럼] 사랑과 죽음과 인간에 대한 어떤 영화

2022.01.19 06:00:00 13면

 

 

1.

겨울밤, 인터넷 다운로드로 오래된 영화를 봤다. 《패왕별희(覇王別姬)》. 1993년 첫 상영 당시 잘라낸 15분을 추가한 완전판, 이른바 《패왕별희 디 오리지널》이다. 알다시피 이 작품은 유명한 경극(京劇) 제목을 영화 이름으로 빌려왔다. 한나라를 창업한 유방과 천하쟁패를 겨룬 초패왕(楚覇王) 항우. 그와 일생의 연인 우희(虞姬) 사이의 비극적 사랑과 죽음을 다룬 공연극이다.

 

이 경극의 정점은 사면초가에 빠진 항우의 탈출을 위해 우희가 칼로 자기 목을 찌르는 장면이다. 사마천은 《사기(史記)》 '항우본기(卷七. 項羽本紀)'에서 쓰러진 우희를 안고 패왕이 부른 애절한 노래를 다음과 같이 전한다. 이름하여 해하가(垓下歌)다.

 

“힘은 산을 뽑고 기운은 세상을 덮지만

때는 불리하고 추(오추마, 烏騅馬)는 가지 않는구나.

추가 가지 않으니 어찌하면 좋을고

우희야 우희야 어찌하면 좋을고“

 

영화 패왕별희는 어떠한가. 경극 연습장에서 어린 시절을 함께 한 의형(義兄)을 사랑하게 된 데이(蝶衣, 장국영 분). 경극에서 주인공 우희를 연기하는 이 남자 또한 이룰 수 없는 사랑에 절망한다. 패왕과 우희의 고사를 이중적 메타포(metaphor)로 차용한 것이다. 하지만 커튼을 열어보면 또 다른 이야기가 숨어있다.

 

일본의 침략 시점부터 문화대혁명에 이르기까지 짐승처럼 헐떡이는 투쟁이 천지를 물어뜯던 중국 현대사. 그 수십 년을 관통하며 그저 사람답게 살고 싶어 몸부림친 샤오루(段曉樓, 장풍의 분)와 주센(菊仙, 공리 분) 부부의 비극. 발버둥을 치다 치다 결국에는 갈가리 찢겨버리는 두 사람의 운명 말이다.

 

최고의 패왕 연기 배우와 한낮 기루(妓樓)의 여인으로 만났지만, 평생을 두고 가슴속 붉은 마음(丹心)을 놓지 않았던 샤오루와 주센. 이들의 애달픈 사랑이 러닝타임 171분 내내 관객의 가슴을 찌른다. 하지만 이 작품은 단순히 사랑의 의미를 묻는 영화만은 아니다. 격동하는 역사와 압도적 스토리 너머에 조용히 숨을 쉬며 관객을 지켜보는 괴물이 있다. 손안에 움켜쥔 과자처럼, 인간의 삶을 함부로 바수어 삼키는 시대의 광기 말이다. 이 영화는 그 괴물에 대한 증언이기도 한 게다.

 

2.

가장 강렬한 캐릭터는 역시 장국영이다. 이 영화는 마흔여섯에 스스로 세상을 등진 그의 전성기였던 서른여섯에 찍었다. 잊지 못할 장면은 어느 비 오는 밤이다. 닥쳐올 문화대혁명의 광기를 피하려고 집 안에서 의심 살만 한 물건을 태우던 샤오루와 주센. 두 사람이 어두운 격정에 빠져 사랑을 나누는 모습. 그것을 창 밖에서 몰래 지켜보다 쓸쓸히 돌아서는 데이의 눈빛이었다.

 

영화 속 데이는 동성애자다. 남자에도 여자에도 온전히 포함 못되는 경계인인 게다. 정치와 예술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하고 허공을 부유한다. 그러한 정체성의 허무를 견디기 위해 아편중독에 빠지고, 경극 속의 우희에게 자신을 병적으로 투영시킨다. 영화의 중요 장면마다 그가 부르는 노래 가사는 이렇다.

 

"나는 원래 사내아이로 태어나서 계집아이가 아닌데“

 

이 구절이 데이의 한평생을 표상한다. 나아가 패왕별희가 경계인의 운명을 다루는 영화임을 암시한다. 떠올려 보면 예술 자체가 그러한 것 아닌가. 인간의 땅에 발을 디딜 수도 없고 신의 하늘을 날아다닐 수도 없는 이카루스. 예술하는 자의 삶을 채우는 것은 어찌 못할 불완전과 공허다. 그러한 불일치의 에너지가 역설적으로 그를 무대로 밀어낸다. 미친 듯 춤추고 노래 부르고 붓을 휘두르게 만드는 것이다.

 

또 한 명의 인상적인 인물은 천하의 악종으로 등장하는 데이의 후계자다. 나는 영화를 보면서 이 배은망덕한 캐릭터가 각본을 쓰고 감독한 첸 카이거의 젊은 시절 모습이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1952년에 태어난 카이거는 문화대혁명이 발발한 1966년 고작 14살이었다. 그럼에도 미친 듯이 홍위병의 붉은 완장을 휘둘렀다. 죄 없는 자기 아버지를 국민당 스파이로 고발한 철부지였다 한다.

 

이 점에서 첸 카이거가 영화에서 가장 인간적인 인물로 주센을 설정한 것은 당연한 귀결로 보인다. 비록 기루에서 몸을 파는 창부였지만 일평생 한 남자에게 헌신한 여인. 마침내 그토록 사랑했던 남편의 배신 앞에 목을 맨 사람. 주센이야말로 황폐한 홍위병 시절을 관통했던 감독 젠 카이거의 뼈아픈 반성이 만들어낸 이상적 인간상이 아니었을까 한다. 소박하게 생각하고 꿋꿋하게 사랑하고 사람답게 살다 죽는 그런 사람 말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앞뒤 분간 못하고 이념의 광기에 미쳐 날뛰던 천둥벌거숭이 첸 카이거가 비로소 ‘어른’이 되어 제출한 고해성사였던 것이다.

 

3.

《패왕별희》가 발표된 1993년은 중국의 제5대 국가주석으로 장쩌민이 취임한 해다. 하지만 권력의 정점에는 여전히 덩샤오핑이 있었다. 문화대혁명 전 과정을 통해 (처참한 죽음을 맞이한 류사오치의 뒤를 이어) 반동 주자파 2인자로 몰렸던 덩샤오핑. 그가 장시(江西)성 난창(南昌)의 트랙터 수리공장에서 3년 4개월의 하방(下方)을 끝내고 오뚝이처럼 복귀한 것이 1973년이다. 그리고 3년 후 마오쩌둥이 죽고 덩샤오핑은 공산 중국의 지배자가 된다. 그가 추진한 개혁개방 정책이 본격적 발전 궤도에 접어든 때가 영화가 나온 시점과 비슷한 것이다.

 

1981년 6월 중국 공산당 제11기 중앙위원회 제6차 전체회의는 결의를 제출했다. “건국 이래의 역사적 문제에 관한 당의 결의’라는 제목이었다. 이 결의문은 ”문화대혁명은 당·국가·인민에게 가장 심한 좌절과 손실을 가져다준 마오쩌둥의 극좌적 오류며, 그의 책임“이라고 규정한다.

 

문화대혁명은 조반유리(造反有理)를 부르짖으며 영구 혁명을 꿈꾼 마오쩌둥 이념의 절정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10년 동안 중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는 참담한 피폐를 거듭했다. 피해 사망자가 최고 천만 명에 이를 정도의 비극이 발생했던 게다. 덩샤오핑이 권좌에 오른 후 마오쩌뚱에 내린 평가는 이렇다. 공(功)이 7이고 과(過)가 3이라고. 그러한 30퍼센트 잘못의 대부분을 차지한 것이 바로 문화대혁명이었던 것이다.

 

패왕별희는 마오쩌둥 시대의 그 같은 광기 어린 폭주를 영화 예술적 차원에서 정면으로 비판한 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오쩌둥의 영구혁명론을 잠재우고 덩샤오핑의 주도로 새롭게 등극한 사회주의 시장경제의 데마고그적 기념탑이었던 게다.

 

페이스트리 빵 같다고나 할까. 역사와 사랑과 비극에 대한 겹겹이 중층적 의미를 품고 있는 이 작품이 첫 상영된 지 내년이면 30주년이다. 하지만 영화는 그러한 세월의 흐름을 훌쩍 뛰어넘어 아직도 생생한 현재감을 준다. 시대와 공간을 초월하여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보편적 메시지가 있기 때문이다.

 

나라의 명운을 가를 대선이 채 두 달도 남지 않았다. 야당 후보 부인의 녹취록이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다. 이렇게 시절이 하 수상할수록 때로는 영화 한 편이 세상 속에서 항심(恒心) 잃지 않고 걸어 나가는 이정표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아직 못 보신 분께) 오래되었지만 늘 새로운 이 영화를 적극 추천드리는 이유다.

김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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