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행 칼럼]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

2022.02.24 06:00:00 13면

 

 

중국의 소설가 옌롄커의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가 한국에서 영화로 만들어져 개봉되었다. 이 소설은 판금조치되었기 때문에 중국에서 영화로 제작될 수 없다. 한국의 장철수 감독이 영화화한 배경에는 이런 까닭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원작은 서사가 굵직하고 남녀 간의 육체적 사랑이 극적이어서 영화문법과도 일맥상통한다.

 

중국 인민군 사단장 관사 취사병인 우이왕은 사단장 부부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이 인민을 위한 복무라고 굳게 믿는다. 그러나 사단장이 장기 출장을 떠난 사이 그의 젊은 부인 류롄에게

유혹을 받는다. 우다왕이 거듭 뿌리치자 류롄은 "인민을 위해 어떻게 복무하겠다는 거지?" 물으며 "인민을 위해 복무해야지. 어서 벗어." 하고 재촉한다. 그는 끝내 무너져 내리고 그녀에게 "정말 인민을 위해 복무하는군. 잘했어. 아주 잘했어."라는 찬사를 받는다.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爲人民服務)'는 모택동의 유명한 연설 제목으로 혁명정신을 상징하는 언어다. 그런데 소설은 이 성(聖)스러운 언어를 성(性)스러운 언어로 끌어내린다. 변질되고 타락한 혁명을 극명한 대비를 통해 드러낸 것이 이 소설의 백미다. 인간해방을 내건 공산당 체제도 억압과 부패로 찌들어 있다는 서사적 보고인 것이다.

 

중국의 '50후·60후' 작가(50년대 후반에서 60년대 후반에 걸쳐 태어난 작가)는 그 이전 세대 작가나 개방 세대 작가와는 확연하게 구분된다. 혁명 속에서 일그러진 인간상을 그려 세계문학의 일원으로 크게 환영받고 있는 것이다. 전근대성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 중국 인민들에게 큰 자극이 되고 있는 것도 물론이다. 특히 옌롄커의 문제의식은 한국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많은 영감을 준다.

 

한국 사회는 지난 80년대 민주화 운동이라는 혁명의 시기를 겪었고 이후 40년이 흐른 지금까지 그 정신이 시대의 중요한 좌표로 자리 잡았다. 시대를 붙들고 있었던 전근대성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되었다는 걸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사회의 촉매제가 되어 눈부신 발전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 정신이 훼손돼가고 있는 이즈음이다. 에피소드 한 토막 들어보자. 이른바 586 학생 운동권 출신의 시민운동가가 지원금으로 술 마시고 자동차 기름을 넣는 등 사적으로 유용했다. 공무원이 감사하겠다고 통보하자 그는 자치단체장이 자신과 민주화 운동을 함께 한 동지라며 적반하장 격으로 큰 소리를 쳤다. 아울러 그는 공무원에게 민주주의에 대해 일장훈시를 했다. 그가 떠든 '민주주의'는 소설에서 희화화한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와 무엇이 다를까?

 

그는 한 술 더 떠 임기가 끝난 자치단체장 선거운동원이 되어 반대하는 세력에게 반민주주의자, 반개혁 세력이라는 딱지를 붙였다. 민주주의가 단물 빠진 껌 신세가 되고 만 것이다. 어쩌랴! 이 에피소드는 실제 있었던 일이니. 더한 일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한국에서 빈번하게 빚어지고 있지 않을까?

 

옌롄커의 소설은 색 바랜 구호에 대한 이야기다. 박제가 된 혁명에 관한 중국의 이야기면서 동시에 한국의 이야기인 것이다.

 

이건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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