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윤의 좌충우돌] 마을로 가는 길

2022.03.11 06:00:00 13면

 

나는 마을활동가다. 일터가 아닌 삶터에서 마을활동은 감사(感謝)와 인정(人情)의 노동이다. 대도시가 허락하지 않을 듯한 그런 삶을 알게 된 것은 내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서울살이 20년, 삶의 가치와 의미를 나는 마을에서 발견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쟁이 아닌 연대와 협동으로 하고 싶은 만큼, 할 수 있는 만큼, 느슨하고 느리고 느긋하게 할 수 있는 일들이 어디 있단 말인가. 만나도 그저 멀뚱멀뚱하던 이웃들 사이에 관계가 만들어지고 공공의 문제를 해결할 때마다 발휘되는 집단지성은 또 얼마나 짜릿한가. 마을은 하나의 ‘인격체’가 되어가는 느낌이었다.

 

내 인생 가장 푸르른 날 경력 단절 여성이 되어 출산과 육아로 시간을 보냈다.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것은 감격이었지만 내 삶은 어디론가 자꾸 흘러서 멀리 가버리는 듯했다. “사회로” 나가려 무던히 애썼으나 한번 닫힌 문은 열리지 않았고 몸은 가정에 묶였다. 마흔두 살에 셋째를 낳자 내 인생 모든 게 끝난 기분이었다. 사회생활은 더 이상 불가능해 보였다. 아이 셋을 데리고서라도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일이 있기는 한 걸까? 그러자 ‘낙후된 마을과 떠나는 이웃’이 보였다. 한국사회 변혁까지는 아니더라도 “내가 살고 있는 동네” 하나쯤은 바꿀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렇게 삶의 막다른 길목에서 마을을 만나게 되었다.

 

협동조합, 사회적 기업, 마을기업, 공동육아, 공동체에 관심이 있는 사람을 찾는다는 벽보를 붙이자 공공의 가치와 삶을 추구하는 주민들이 하나둘 모였다. 생판 모르던 이웃들이 놀며 꿈꾸며 어울렸다. 마을이 생긴 이래 한 번도 열린 적 없던 마을장터와 마을축제도 열렸다. 마을교육공동체 '마을과아이들', 마을식당 '느티나무그늘아래평상', 마을활력소 '들락날락' 등 공유공간도 만들었다. 관계성과 연결성에 눈을 뜨고, 사유보다 공유, 공동체의 기쁨을 함께 할 이웃들이 생겼다.

 

주민제안 사업을 통해 70대 할머니가 잊었던 화가의 꿈을 떠올리고 30대 화가 여성이 할머니의 그림 작업을 도왔다. 청년이 가난한 노인을 돌보는 일에 참여했다. 장애를 가진 아이는 우리 모두의 아이로 사랑받았다. 무뚝뚝한 대기업 중년 남성이 마을 장터에서 천막을 쳤다. 일용직 목수 일을 하는 주민은 시간을 내어 마을 공간을 만들어주었다. 식당을 운영하는 아주머니가 공동체 정원 식물들에 물을 주었다.

 

그렇게 이웃이 되어가고 그렇게 공동체가 되어가면서 “주민의 이름으로” 모두 평등하다는 것을 경험했고 집단지성의 힘을 배웠다. 일터에서는 교수, 교사, 화가, 목수, 만화가, 성우, 회사원, 사회복지사, 연구원, 택배노동자, 학생, 건설노동자, 자영업자, 공무원 등 각자의 직함으로 활동하지만 삶터로 돌아오면 모두 주민이다. 비로소 이웃이 되고 하나로 연결되어 마을에서 살아갔다. 우리에게 마을은 세상에서 가장 작은 세계이자 가장 큰 학교였다.

박영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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