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휘의 시시비비] ‘말빚’

2022.03.16 06:00:00 13면

 

 

다언삭궁(多言數窮)이라는 사자성어가 있어요. 노자(老子)의 도덕경 제5장에 나오는 ‘말이 많을수록 자주 궁색해지니 속을 지키는 것만 못하다(多言數窮 不如守中)’는 구절이 그 유래랍니다. 일상생활에서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일수록 곤경에 처하게 되는 경우를 보는 일이란 그리 귀하지 않지요. 남아일언중천금(男兒一言重千金)까지는 아니더라도, 과연 속에 든 것도 없이 말만 많은 사람이 인정을 받거나 실속을 차리기는 힘든 건 사실이잖아요?

 

20대 대통령선거가 1% 차이도 아닌 고작 0.73% 차이로 당락이 갈리면서 대단원의 막을 내렸군요. 어느 쪽도 흔쾌하지 못한 성적표를 받아든 여야 정치권 표정들이 야릇하네요. 길게는 선거 기간 1년 내내 쏟아낸 말 중에 몹쓸 말들이 얼마나 많았는지를 헤아려보면 기가 막히지요. 상대방을 향해 날린 용감무쌍한 악담들의 잔해 또한 참담할 지경이네요.

 

선거판은 ‘말’로 시작해서 ‘말’로 끝나는, 그야말로 말의 성찬(盛饌)이에요. 특히나 까다로운 유권자들을 온갖 꾐수를 동원하여 더 홀리는 쪽이 이기는 게임이 돼버렸으니 오죽할까요. 이미 오래전부터 선도(先導) 기능을 상실한 한국 정치판에서 선거는 때마다 막말 혈투로 흘러가곤 해왔지요. 이번 선거도 예외는 아니어서 온 나라를 휘감고 흘러 다닌 온갖 미사여구와 험구(險口)들이 장난이 아니군요.

 

선거가 치러질 적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시종일관 포퓰리즘과 네거티브로 점철되는 우리의 여야 대결은 선진 민주주의로 가는 길을 아득하게 만들어요. 나랏일을 맡기기 가장 좋은 사람을 뽑는 잔치여야 할 선거가 끝내 일장춘몽이 되고 마는 게 이젠 일상이 돼버렸잖아요. 매번 ‘덜 나쁜 후보’를 고르는 투표라니… 참으로 씁쓸한 노릇이지요.

 

여당의 석패(惜敗) 원인을 놓고 ‘부동산정책 실패’다, ‘대장동 의혹’이다 말이 많지만, 국민에게 진 ‘말빚’을 제대로 갚지 않은 것이 중요한 패인 중 하나였다고 생각해요. 이번 대선에서 오직 승리하겠다는 일념으로 뒷감당할 요량은 젖혀두고 마구 내던져 쌓은 정치권의 ‘말빚’이 또 산처럼 쌓였네요. 겉으로는 잊어버린 듯이 굴지만, 민심은 절대 그렇지 않아요.

 

표심 꼬드기느라고 내뱉은 헛소리들 망각의 늪으로 몽땅 밀어 넣고 싶겠죠. 하지만 녹음, 녹화기술이 엄청나게 발달한 이 시대에 정치꾼들의 ‘말빚’은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 주권자들의 청구서로 꼭꼭 저장돼 있어요. 여차하면 부메랑이 되어 가차 없는 비수로 눈앞에 날아들 거예요.

 

아무리 ‘일 앞서는 사람’이 희박한 세상이라 할지라도 유권자에게 진 ‘말빚’을 가벼이 여기는 쪽은 이제 미래가 없어요. 승패를 불문하고, 선거 기간 내내 말이 그렇게 많았으니 지금 여야가 함께 궁색해지는 건 당연지사죠. 켜켜이 쌓인 ‘말빚’들 잘 챙겨보시고 서둘러 약속을 지키세요. 오는 6월 지방선거도 결국 그 빚 먼저 잘 갚는 쪽이 승리할 거니까요.

안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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