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행 칼럼] 히틀러를 읽어야 하는 시간

2022.04.07 06:00:00 13면

 

 

2차 세계대전 전후에 저널리스트로 활동했던 제바스티안 하프너의 『히틀러에 붙이는 주석』(돌베개 출간)을 읽으면 허탈해서 잠을 이루지 못한다. 하프너는 저널리스트답게 히틀러에 관한 기록을 건조하게 따라간다. 하지만 거리두기가 오히려 실체를 더욱 뚜렷하게 드러내 과거를 현재진행형으로 만든다.

 

독일 포로수용소에서 굶어 죽은 러시아군 포로 300만 명. 폴란드에서 유대인 200만 명 살해. '쓸모없는 식충이'로 분류된 독일인 10만 명 살해. 집시 근절작전으로 독일인 50만 명 살해. 폴란드 지도층 근절 정책으로 100만 명 살해...

 

"히틀러는 오직 자신의 개인적인 만족을 위해 수많은 해롭지 않은 사람들을 죽게 하였다. 그런 측면에서 그는 알렉산드로스나 나폴레옹과 같은 범주에 속하지 않고, 여성 연쇄살인범 퀴르텐과 소년 연쇄살인범 하르만과 같은 범주에 속한다. 그의 손에 희생된 사람은 몇 십 명 또는 몇 백 명 단위가 아니라 몇 백 만 명 단위로 헤아리게 된다. 그는 그냥 대량학살을 행한 범죄자이다."

 

하프너를 떠나 이제 우리가 빈 칸을 채워야 한다. 히틀러의 대량 학살, 제노사이드를 과연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 자본주의라는 구조적 모순이 낳은 필연인가? 아니면 개인의 맹목적 일탈인가? 인간 소외의 자본주의 체제가 아무리 비정하다해도 목적의식적으로 사람을 대량 학살할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자본주의에 눈을 돌리는 어떠한 분석도 연목구어일 수밖에 없다.

 

개인의 맹목에서 비롯한 것이 명백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게 해소되는 건 아니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히틀러 이후 유럽의 철학은 인간의 광기에 대한 규명에 모든 것을 걸었다. 인간의 이성은 과연 믿을 수 있는 것인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아도르노의 그 유명한 부정변증법도 이성 밖에 내동댕이 처진 것에 대한 천착으로 보다 새롭게 인간을 이해하려는 시도였다.

 

현대 심리학은 임상실험과 유전율 분석을 통해 반사회적 인격 장애자인 소시오패스가 인간의 4%에 달한다는 결론을 도출했는데 이는 히틀러를 설명할 수 있는 직접적인 것이다. 실제 이 분야 세계적 권위자인 미국 하버드 의대 정신과 마사 스타우트 교수는 히틀러를 전형적 소시오패스로 못을 박았다. 히틀러를 이해할 수 있는 지평이 그만큼 넓어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무언가 빠져 있다. 한 사람이 대량 학살하는데도 제어하지 못한 사회적·정치적 환경이 그것이다. 당시 히틀러를 자유롭게 비판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돼 있었다면 대량 학살이 과연 가능했을까? 결국 민주주의가 작동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성이 붕괴하고 소시오패스의 잔혹을 막을 수 없었던 것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척박한 풍토에서 뿌리내린 독일 시사주간지 슈피겔의 슬로건이 영감을 준다. '좋은 소식은 뉴스가 아니다'. 권력에 대한 영원한 견제감시를 함축한 것이다. 그러고 보면 견제감시는 민주주의의 다른 말 같다. 지난 대선의 0.73% 근소한 결과는 바로 견제감시의 힘 아닐까? 위험한 두 권력자에게 동시에 경고를 보낸.

 

 

이건행 mono316@kg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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