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섬을 가다 71- 대청도 내동이야기(2) 원 순제와 신황당

2022.04.21 09:35:38 15면

 대청도 내동에는 지금도 원 순제를 둘러싼 역사적 사실과 이를 바탕으로 내려오는 전설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대청도 하면 순제, 순제 하면 대청도라는 공식이 성립될 정도이며 대청도 주민 사이에서는 널리 알려졌다. 원나라 역사에서 대청도는 반드시 언급되는 곳이다.

 

‘세종실록지리지’ 등 옛 문헌에 등장하는 ‘도우첩목아’ 또는 ‘타환첩목이’로 기록된 인물은 중국 원나라 마지막 황제이자 두 번째 황후가 고려사람 기황후(奇皇后)인 것으로 유명한 순제(몽골명 토곤테무르, 1320~1370)다. 사랑과 권력의 함수 관계를 주제로 ‘기황후’란 제목하에 과거 TV 드라마로 방영된 바 있다. 원래 ‘순제(順帝)’는 명나라 묘호(廟號)이고, 원나라 묘호는 ‘혜종(惠宗)’, 지정(至正) 연간에 제위에 올라 ‘지정제(至正帝)’라고도 불렸다.

▶ 대청도 유배, 그리고 원 황제 등극

순제가 태어날 당시인 1320년부터 13년 간 원나라는 7명의 황제가 교체되는 왕권쟁탈전이 진행됐다. 순제는 바로 그 시기에 해당하는 1330년(충숙왕 17) 7월부터 이듬해 12월까지 1년 반 정도 머나먼 대청도에서 유배 생활을 했다.

 

‘원사(元史)’의 기록에 의하면 ‘1329년 순제의 숙부 문종(文宗)은 순제의 아버지 명종에게 제위를 양위햇는데, 명종이 갑작스레 죽자 1330년 문종이 다시금 제위에 오르게 됐다. 문종은 명종의 부인, 순제와 그 동생을 궁으로 데리고 와서 보살피지만 1330년 문종의 황후인 복답실리(卜答失里)는 자신의 아들을 태자로 세우기 위해 명종의 부인이자 순제의 어머니인 팔불사(八不沙)를 제거하고, 순제를 고려의 대청도로 유배를 보냈다.

 

한편 1331년에는 ‘명종이 북방의 사막에 있을 때 본디 자신의 아들이 아니라고 일렀다’는 내용의 조서가 반포되면서 순제의 유배지를 대청도에서 다시 원나라 광서(廣西)의 정강(静江)으로 옮겼고, 1332년 순제의 동생 영종(寧宗)이 제위에 올랐으나 그 해 사망하면서 마침내 1333년 유배 생활을 하던 순제가 제위에 오르게 됐다.

 

이외에 순제의 대청도 유배와 관련된 내용은 자료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으며, 전설에 의하면 아버지의 병환을 낫게 하기 위한 계모의 모략으로 두 눈을 잃고 답답한 마음에 해주에 이르렀다. 이곳에서 꿈을 꾸고 꿈속에서 미륵을 만나게 되는데, 이후 미륵의 소원대로 미륵을 위한 집을 지었으니 이것이 유명한 신광사(神光寺)이며, 그는 황제가 됐다는 전설이다. 즉 신광사의 연기 설화와 관련된 내용이다.

▶ 원 순제 궁궐터와 신황당

순제가 대청도에 유배됐다면 어디서 살았고, 남아 있는 유‧무형의 흔적은 무엇이 있을까? ‘옹진군지’에는 여러 시사점을 주는 내용이 수록돼 있는데 “순제가 유배돼 머문 곳으로 내동 뒷산의 동내동 서낭당이 대표적인 유적지다. 이 서낭당은 순제의 신위를 모신 곳으로, 적어도 일제강점기 이전부터 존재해온 서낭당이며 대청도 서낭당 중 본당의 지위를 지니고 있는 곳이다.

 

아울러 동아일보 1928년 8월 25일자 기사를 보면 이곳은 순제의 신위(위패)를 모신 곳으로서 초가지붕이 함석지붕으로만 바뀌었을 뿐 옛 모습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당시 기사 일부를 보면 내동 뒷산에는 늙은 느티나무와 잡목과 솔 나무가 울창한 가운데 조그마한 서낭당이 있다.

 

어두컴컴한 나무숲에 호랑이가 나올 듯한 잡초를 간신히 헤치고 들어가 보니 백옥상 위에 목촛대가 좌우로 놓이고 그 중간에는 순종황제신위(順宗皇帝神位)라는 기울어진 위패가 외로이 서 있다. 이곳이 옛날 순제가 집을 짓고 살던 곳이라 하여 그 집터에 신당을 지었는데 지금도 어민들이 제사를 지낸다”고 서술하고 있다.

 

‘옹진군지’ 내용은 일제강점기 김동진 기자가 쓴 기사를 인용하면서 순제의 집터 그리고 집이 없어진 후 순제를 기리는 서낭당(일명 신황당, 神隍堂)과 그 내부 모습을 설명하고 있다. 시사점을 보면 순제는 서낭당이 많았던 대청도에서 본당의 지위를 지니고 있었다는 내용으로 보아 적어도 1930년 전까지는 순제가 대청도민 마음속 1번지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대청도 노인층은 과거 ‘신황전’이라는 소설책을 거의 읽었다고 하며 ‘서내동과 사탄동 넘어가는 오른쪽 산속’에 있는 묘지를 ‘호인(胡人)의 공동묘지’라고 부르고 있어 순제 일행의 묘가 아닌가 하는 말들이 전한다. 다른 도서지역의 경우 대부분 ‘임경업 장군’을 숭배한다면 순제가 민간 신앙으로 대세를 이뤘던 대청도는 이례적인 경우다.

 

불행스럽게도 이 신황당은 2013년 도로공사로 사라졌으며 6‧25 당시 백골부대가 있던 학골 주변의 ‘동내동 서낭당’ 일명 ‘신황당’에 대한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한편 ‘세종실록지리지’ 등 많은 옛 문헌도 순제의 흔적을 기록하고 있는데 동아일보의 기사와는 달리 순제의 집터는 현재의 대청초등학교 자리에 위치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대청초등학교를 순제 궁궐터로 보았고 그 외에 대청도의 옥죽포와 고주동, 소청도의 분바위, 옹진반도의 교정면(交井面) 국사봉과 요래동(堯來洞) 등이 순제와 관계된 장소로 파악된다./ 김석훈 백령중고 교감·인천섬유산연구소 이사

김석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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