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섬을 가다 73-옛 포구와 모래의 명소, 옥죽동(玉竹洞) 이야기

2022.05.04 15:48:27

 옥죽동(玉竹洞)은 행정구역상 대청면 대청3리, 대청도의 북쪽 해안에 있으며 선진포구가 한적했던 시절 대진동(大津洞)과 함께 대청도를 대표하던 포구로서 명성을 떨쳤다. 선진동에서 검은낭 모래고개를 넘어오다 내동과 옥죽동으로 갈라지는 삼거리에서 우측으로 내달리면 옥죽동에 닿는데, 2022년 3월 현재 97세대 177명이 거주하고 있다.

 

동쪽은 북한의 황해도 옹진반도의 서쪽 섬들이 보이고 서쪽은 축동을 기점으로 양지동, 동내동과 접하고 있다. 남쪽은 검은낭 산줄기를 경계로 선진동과 경계를 이루며 북쪽은 백령도 동쪽 끝과 마주하고 있다.

 

옥죽동의 옥죽포와 관련해 ‘조선왕조실록(정조실록)’에는 ‘내동은 북쪽 높은 산봉우리 아래 지역으로 지금은 기와 조각이 나오는데 원 순제의 옛터라고 한다. 그 아래는 옥자포(玉子浦)’라 기록하고 있어 내동과 인접한 ‘옥죽동’이 ‘옥자포’임을 알 수 있다.

 

이 포구는 대청도의 역사와 함께하는 포구로서 오랜 과거부터 내동의 관문 역할을 했다. 관문(關門)은 다른 지역으로 나아가는 통로가 되는 지점을 말하는바 고려의 원 간섭기 당시 순제를 비롯한 황족들이 50년 간 유배 생활할 때 드나들던 통로(출입구) 역할을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 1799년 대청도 동내동에 진(鎭)이 설치된 이후에도 진장이나 군함들이 이곳을 통해 드나들었다. 다만 배가 들어와 정박한 지점은 현재의 포구보다 ‘강틀논’ 안쪽까지 들어와 동내동 진청사에 다다랐을 것으로 보인다. 선박이나 청사가 만(灣) 깊숙이 위치하고 있어 외부로부터 노출이 적어 전략적 요충지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제방을 쌓아서 불리워진 ‘축동(築洞)’이란 지명은 서내동에서 내려오는 물을 가둬 농업용수로 쓰거나 조수(潮水)를 막았던 제방은 아닐까 추정해 본다.

 

따라서 ‘강틀논’은 원래의 지형이 아닌 간척에 의한 것이며 논바닥 밑에는 모래 바닥 혹은 갯벌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지형 특성을 고려한다면 모래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보인다. 지금도 개천을 따라 바닷물이 깊숙이 드나들고 있다.

 

현대에 들어 원래 옥죽포는 4~5가구가 살던 곳으로 1951년 1·4 후퇴 당시 난민들이 대진동에 모여 마을을 이루다가 1970년대 중반 강제이주정책에 따라 대진동은 사라졌다. 그 당시 대진동 주민들은 대다수가 옥죽동으로, 일부는 선진동으로 분산 이전할 때 옥죽동은 70여 세대의 마을을 형성하게 됐다.

1950~80년대까지의 주된 생업은 까나리잡이였다. 5월부터 하지(6월 20일경)까지 약 두 달에 걸쳐 이뤄졌으며 해안가 자갈밭에는 까나리를 삶을 수 있도록 가가호호 ‘까나리덕’을 설치했다. 그러나 ‘까나리덕’은 해안가 도로를 만들면서 모두 매몰됐고 조기잡이와 까나리를 미끼로 하는 우럭, 놀래미 잡이를 통해 생업을 유지했다. 금어기를 제외한 시기는 홍어와 조기를 주로 잡는다.

 

요즘도 집집마다 홍어를 말리는 풍경은 낯설지 않다. 해안가에는 ‘홍어마을’ 조성을 위한 노력을 다하고 있다. 현재 홍어잡이는 5가구 정도가 있으며, 미끼가 없는 건주낙으로 잡는다. 8월부터 11월까지는 주로 멸치잡이를 했다.

 

또 풍어와 안전을 기원하던 당집이 있었지만 현재는 사라졌고, 정월 대보름에 배에서 용왕님께 술 한잔 바치는 것으로 축소됐다. 2016년 3월에는 대진동 해안가 군부대 진지 구축 과정에서 작업 인부에 의해 고려시대로 추정되는 금불상이 발견된 바 있다.

옥죽동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옥죽포에서 대진동 두리장수리까지 해안가에 넓게 퍼진 모래다. 이들은 은빛 백사장을 이루고 있으며, 사리 때의 썰물에는 큰 평원을 이루는 백사장이 남쪽의 선진동과 경계를 하는 검은낭 산줄기 등성이까지 이어져 마치 많은 눈이 와서 쌓인 모래산이 푸른산 줄기 중간에 이뤄지고 있어 희귀한 명물로 알려졌다.

 

옥죽동 사구는 검은낭 산기슭에 형성된 한국의 사하라사막으로서 백령대청지질공원 명소 중 하나다. 모래의 공급원은 가까이 농여나 미아동 해변가의 모래이며, 멀리는 대청도와 비슷한 사구인 황해도 용연 몽금포 일대일 가능성이 크다.

 

오랜 세월 쌓여 거대한 사막을 이룬 이 모래산은 바람의 크기나 방향에 따라 천의 얼굴을 하며, 검은낭 산 정상을 향해 기어오르는 등반사구(Climbing dune)이기에 정상을 넘어 아래 선진동 논골(畓洞)까지 이어졌다.

 

과거 논골에 있었던 대청공립보통학교 그리고 이름이 바뀐 대청공립국민학교, 대청국민학교에 이르기까지 사막의 피해가 심해 학교가 파묻혀 내동으로 이전했다는 사실은 모래 이동의 정도와 사막의 규모를 실감케 한다. 당시 학교를 다녔던 분의 전언에 의하면 발목이 푹푹 빠졌다고 하며 경사진 산비탈에서 치마를 이용해 모래썰매를 타면서 학교를 다녔다고 회상한다.

 

이런 어려움과 피해 때문이었을까? 1970년대 초반 생활의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옥죽동 사구 일대에 방사방풍림을 심었다. 심은 지 50년 된 지금은 소나무의 성장으로 모래 유입이 차단됨에 따라 사구의 활동이 멈춰 많이 훼손된 상태다. 앞으로 사막도 살리고 주민의 불편이 최소화될 수 있는 일석이조의 현명한 대안이 나오길 바란다./ 김석훈 백령중고 교감·인천섬유산연구소 이사

김석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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