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맷돌고성(孤聲)] 의암 손병희를 아시나요?

2022.05.25 06:00:00 13면

 

 

우리 역사에는 반드시 재평가되어야 할 인물이 많다. 특히 엄혹한 시대에 일신의 안일함보다는 조국과 민족의 장래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던진 분들이 그러하다. 의암 손병희 선생도 그중에 한 분이다. 3·1독립혁명의 민족대표 33인 중의 대표임에도 정작 3.1혁명에 우리가 기억하는 인물은 유관순 누나뿐이다.

 

하물며 손병희가 동학혁명 당시 동학군 최고지도자였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얼마나 있을까. 동학혁명 하면 무조건 전봉준을 떠올리지만, 손병희는 글쎄다. 그러나 손병희는 30만 동학군의 총지휘자였다. 1차 동학혁명은 호남지방에 국한된 거사였지만 그해 9월의 2차 기포는 동학교주 해월 최시형에 의해 전국의 동학도가 총동원할 것을 천명한 항일전쟁이자 진정한 혁명이었다. 해월은 1차 기포에서 전투력과 지휘력을 인정받은 전봉준을 호남의 최고지도자로, 그리고 영남과 충청, 강원 그리고 경기도와 이북지역 동학군의 총지휘관으로 당시 34살의 손병희를 임명했다.

 

안타깝게도 동학혁명은 무능한 정부와 왜군에 의하여 좌절되었지만, 보국안민·광제창생·척양척왜의 기치 아래 전국을 들불들의 함성으로 뒤덮었다. 혁명의 참여자들 대부분 체포되어 처형당하는 순간에도 끝까지 살아남은 유일한 지도자는 손병희였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 동학의 불씨를 살리고 백성이 하늘처럼 대접받는 인내천(人乃天)의 세상을 건설해야 할 의무를 부여받은 동학의 3대 교주가 되어 있었다. 북쪽 지방에서 동학은 다시 살아났지만, 관의 추적을 피해 손병희는 적국인 일본으로 숨어야 했다. 일본에서 체류하는 동안 그가 목격한 것은 일본의 높은 민도와 개화된 생활이었다. 충격을 받은 손병희는 국내의 개화혁신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측근인 이용구의 배신으로 동학은 일진회와 같은 노선을 걸어 졸지에 친일조직으로 오해되었다. 손병희는 급거 귀국해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친일파들을 출교시켰다. 민족종교 천도교의 탄생이었다. 이후 손병희는 언론·출판과 교육사업에 투신하였다. 오늘 고려대의 토대를 닦은 이도 손병희였다. 1910년 조국이 강제병탄 되자 그의 노선은 자주독립으로 전환되었고 준비를 하면서 기회를 엿보다 1919년 3월 1일을 맞이하였다. 천도교는 3·1혁명의 대중화를 위해 모든 종단의 참여를 독려하였고 일원화를 위해 독립선언서를 인쇄했으며, 시위방식은 철저한 비폭력을 고수케 했다. 위대한 3.1혁명은 그의 원대한 이상에서 출발한 것이고 임시정부 헌법의 민주공화정도 그로부터 기원했다.

 

지난주 천도교에서는 의암 손병희의 추모식이 조촐하게 치러졌다. 혁명가요, 종교개혁가이자 독립운동의 선구자인 그는 옥중에서 받은 고문 등으로 100년 전 숨을 거두었다. 백범 김구가 해방 후 환국해서 처음으로 한 공식행사는 임정의 요인들과 함께 서울 우의동에 있는 손병희의 무덤을 찾아뵙고 귀국 보고를 드리는 것이었다. 동학혁명 당시 김구는 해주의 접주로 손병희의 부하였다. 한없이 고개 숙어지는 손병희 선생 순국 100주년이었다.

임형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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