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윤의 좌충우돌] 깊은 강

2022.05.31 06:00:00 13면

 

‘일본 극우’라는 단어를 들을 때마다 토야를 떠올린다. 20여 년 전 남인도에서 만난 친구!

 

나는 시간을 아껴야하는 단기 여행자였고 토야는 돈을 아껴야하는 세계일주 여행자였다. 오토바이는 내가 빌리고, 운전은 그가, 주유비는 반반씩 부담해 고아와 함피를 둘러보자는 제안에 숫기 없는 그는 당황한 듯 망설이다 겨우 말을 꺼냈다.

 

"저는 극우입니다”

 

혐한(嫌韓)시위를 다닐 정도라는 그에게 "그게 어때서?”라 되물으며 우리는 역사가 아닌 비즈니스로 만난 관계라 했다. 그렇게 계약이 성립되어 고아와 함피를 둘러봤다. 스콜-늦은 오후 소나기가 내리면 짜이 집에 뛰어 들어가 지붕 아래에서 비를 피하며 우리는 친해졌다.

 

그는 어릴 때 이지매를 당했고 와세다 법대에 진학, 유흥업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거기서 만난 접대부 여성이 그의 첫사랑. 그러나 사랑에 실패하면서 은둔형 외톨이가 되었고 몇 번의 자살 시도, 몇 번의 사법시험 실패 끝에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고 했다. 자신이 극우였던 것을 진심으로 사과한다고 말했다.

 

마지막 날 그는 데려갈 곳이 있다며 언덕 능선을 한참 달리다 한적한 바닷가에서 오토바이를 세웠다. 모래밭 오두막에서 술을 팔고 있었다. 우리는 파도소리를 들으며 시원한 맥주를 마셨다. 토야는 『깊은 강』이라는 책을 주었고 나는 두 가지 숙제를 냈다. 매일 모르는 사람에게 말을 건넬 것, 국경을 넘을 때마다 내게 엽서를 보낼 것!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그가 보낸 엽서가 도착해 있었다. 낯선 이에게 말을 거는 도전, 관계 맺는 즐거움, 새로운 경험이 적힌 우편물이 날아왔다.

 

그러다 일본을 방문할 일이 생겼다. 1년 만의 재회를 앞두고. 일본인 친구들에게 그가 보낸 편지를 보여줬는데. 얼굴 표정들이 일그러졌다.

 

"글씨가 떨린다. 정신이 불안한 사람이다. 위험하니 만나지 말라"고 했다. 납치 감금 성폭행 살해 등 일본에서 일어난 범죄에 대해 들려주는데 오싹했다. 결국 약속장소에 가지 않았다.

 

수개월 후 토야의 편지를 받았다. 미얀마 여성을 만나 사랑에 빠졌으며 곧 결혼하게 될 거라는. 행복해하는 모습에 약속장소에 나가지 않은 죄책감이 씻겨지는 듯했다.

 

어느 날 채팅창으로 토야가 말을 걸어왔다. 그가 아니라 그의 어머니였다.

 

“토야가 자살했습니다. 박영윤 씨가 누군지 몹시 궁금했습니다.”로 대화가 이어졌다. 미얀마 여성을 만나 결혼을 전제로 거액을 송금했으나 사기당하고, 절망해 목숨을 끊은 것 같다는, 우울증이 심했다는, 담담하게 말하던 그녀는 "당신이 토야의 유일한 친구였습니다. 외로운 아들의 친구가 되어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했다.

 

아. 겨우 그 정도 우정으로 친구 자격을 얻을 수 있다니. 그를 의심해 약속장소에 나가지 않았던 내가.

 

토야가 준 책은 여전히 내 책장에 꽂혀 있다. 비가 쏟아지던 날 마시던 짜이도, 아무도 없는 바닷가에서의 맥주도, 국경을 넘을 때마다 날아오던 엽서도 추억으로 남아 있다. 인연의 깊은 강은 건너지 못한 채.

박영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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