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신문은 창간 당시 재판관련 기사를 쓸 때 속보경쟁에 밀려 한쪽 주장만을 일방적으로 보도하는 기존 행태를 바꾸기로 했었다. 여론재판의 위험성을 막기 위해서였다. 설령 뒤늦은 보도라는 비판을 받는 한이 있더라도 공판에 참여하는 원고와 피고 양측 주장을 모두 듣고 이를 정리해서 독자들에게 그 전체적 맥락을 파악하도록 하는 것이 목표였다. 하지만 속보경쟁이 난무하는 현재 언론 풍토에서 이는 지켜지지 못했다.
최근에 본 다큐영화 '그대가 조국'은 속보 경쟁에 휩싸인 언론의 치명적 약점을 파고든 정치 검찰의 언론 플레이를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다. 수사 과정에서 참고인마저 겁박하고 선별적으로 뽑아낸 진술을 기초로 언론에 흘리고 피의자들에 대한 공소장을 만드는 법 기술자들의 행태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동양대 교수휴게실에 놓여 있던 PC 사용 위치를 가리키는 IP번호가 앞의 세 개 번호만 같고 뒷 번호는 상이함에도 같은 위치라고 강변하는 검찰 측 억지 주장도 소개됐다. 조 장관 부인인 정경심 교수가 PC를 집으로 가져가 딸의 표창장을 위조했다는 사실을 입증하려면 전체 IP 번호가 일치해야 하는 것이 상식이다. 수사 검사가 자신이 원하는 진술을 받아내기 위해 참고인들에게 가한 인격 모독의 고통스런 기억도 고스란히 담겨 관객들을 분노케 했다. 법무부 장관조차 정치 검찰의 표적 수사와 선택적 기소를 피해갈 수 없는 나라에 대해 사람들은 절망을 느꼈다고 말한다.
피의사실 공표죄는 검찰의 여론재판 유도를 방지하기 위해 제정된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 언론은 이미 검찰이 흘린 ‘일방적 사실’을 받아 ‘단독기사’라는 보도를 하는 데 익숙해 있다. 사법부도 여론 재판의 ‘광풍’을 비켜가지는 못하는 듯하다. 예컨대 학위·학력 조작 사실이 탄로나 사퇴한 최성해 총장이 법정에서 여러 차례 자신의 진술을 번복했음에도 법원이 그 일관성과 진실성을 인정하고 만 것도 여론재판 영향 탓이 큰 것으로 추측된다. 문제의 PC에 대한 증거 능력이 일부 탄핵되는 등 논란이 있었음에도 엉터리 IP번호 등을 담은 공소장을 엄격한 검증도 없이 받아들여 정 교수에게 유죄를 확정지었기 때문이다. 사법부가 정의의 최후 보루라고 여기던 국민의 믿음은 이 순간 송두리째 무너진다. 사법부의 흑역사로 기록될 것이다.
‘피의사실 공표’는 조 장관 가족에 대한 인격 살인을 목표로 한 것이 분명했다. 청문회 막판 자유한국당 소속 청문위원들에게 조 장관 딸의 사생활 관련 자료들이 무차별적으로 전달되었고, 검찰의 정 교수 기소 방침이 흘러 들어간 경위 등은 훗날 사법 정의 바로세우기 차원에서라도 그 진상이 밝혀져야 한다. 수사 검사 말고 이 내밀한 사실들을 알 수 있는 이는 없다.
지방선거가 끝나기 무섭게 이재명 전 대선 후보 부인의 법인카드 의혹사건과 관련해 무려 129곳에 대한 당국의 압수수색이 전격 실시되었다. 이번에는 이재명이다. 주홍글씨 낙인이 그와 그의 가족을 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