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황병길의 ‘숙경씨’

2022.06.24 06:00:00 13면


 

김숙경은 함경북도 경원군 양하면에서 가난한 농민의 딸로 태어났다. 1897년 가족들은 러시아의 연해주로 떠났다. 기울어가는 조선에서 가난을 견디지 못해서였다. 열두 살이던 김숙경도 살길을 찾아 조선을 떠나는 가족을 따라나섰다. 하지만 그녀의 부모는 김숙경을 데려가지 않았다.

 

“넌 이미 다른 집 사람이 되었으니 우리와 함께 갈 수 없다.”

 

한 해 전, 11살이던 김숙경을 이웃에 사는 황천금이와 혼약을 맺게 한 그녀의 부모였다. 그녀보다 한 살 위인 천금이는 좋은 사람이었지만 돈 벌러 간다며 러시아와 만주를 떠돌았다. 을사늑약이 체결되던 1905년 천금이는 잠시 집에 들렀다. 남편 천금이는 항일투사가 되어 있었다. 야속했지만 나라를 위해 목숨을 내놓고 살아온 천금이가 자랑스러웠다.

 

천금이는 금방 다시 떠났고, 아이가 생겼다. 아들이 태어나고, 천금이가 다녀간 것을 안 일본 경찰은 김숙경과 시아버지를 잡아가 가두고 고문했다. 집문서와 얼마 되지 않는 땅문서까지 모두 빼앗기고 갓난아이마저 잃은 김숙경은 시아버지를 모시고 한밤중에 고향을 떠났다. 연해주의 연추에서 만난 천금이는 김숙경 끔찍이 아끼고 사랑했다.

 

“숙경씨.”

 

천금이는 아내 김숙경을 언제나 그렇게 불렀다. 조선의 민초 중에 자신의 아내를 그렇게 부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천금이는 자신도 어깨너머로 배운 글을 ‘숙경씨’에게 가르쳤고, 김숙경은 그렇게 깨친 글을 시아버지 황오섭에게 가르쳤으며, 천금이와 함께 항일운동에 나섰다.

 

김숙경은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 만주의 훈춘에서 수천 명의 시위대를 조직하고, 훈춘애국부인회를 만들었다. 훈춘애국부인회 회원들은 독립군을 후원하기 위해 은비녀와 은가락지, 옷감은 물론이고 자신의 머리채마저 잘랐다. 그녀가 모은 6천 루블은 독립군의 무기가 되었다. 그녀는 독립운동에 앞장서며 남녀의 평등을 주창했다.

 

“권리가 없으면 죽은 목숨과 같다. 권리가 있어야 사람값을 한다.”

김숙경에게 독립과 남녀평등은 다른 일이 아니었다.

 

“수레는 두 바퀴로 돌아간다. 여자도 남자와 손잡고 일제와 싸워야 조선을 독립시키고 권리를 쟁취할 수 있다.”

 

그녀의 세 딸은 자라면서 단 한 번도 여자라고 차별하는 말을 부모에게 들어본 적이 없었다고 회고했다.

 

안중근과 함께 무명지를 자른 ‘단지동맹’의 맹원이었고, 국내 진공작전에서 단독으로 일본군 14두를 사살한 ‘훈춘의 호랑이’이 황병길이 황천금의 다른 이름이다. 황병길의 이름도 아는 이가 드무니, 황병길의 ‘숙경씨’를 아는 이는 더욱 드물 수밖에 없다.

 

황병길이 죽는 순간 넘겨준 모젤 권총을 넘겨받은 ‘숙경씨’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항일전선을 떠나지 않았다. 그들의 세 딸도 항일전선에 섰다. 둘째 딸 황정신은 일본 토벌대와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했다. 외아들 황정해도 항일연군으로 싸우다 스물네 살의 나이로 최후를 마쳤다.

방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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