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진의 언제나, 영화처럼] 아이가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너도 그래?

2022.07.21 11:44:20 10면

76. 로스트 도터 - 매기 질렌할

 

배우 출신의 감독(이란 표현도 일정한 편견이 들어간 것이다. 배우가 연출을 하는 것을 여전히 신기해하는 것인 양 굴면 안 된다) 매기 질렌할이 만든 ‘로스트 도터’는 오프닝 장면 그리고 제목 자체만으로는 이야기 전개를 도통 짐작할 수 없게 하는 영화이다.

 

이건 공포인가, 살인극인가, 유괴범 이야기인가. 적어도 서스펜스 스릴러 스타일인가. 영화는 그 어느 것도 아니지만, 그 어느 것 모두에 해당하기도 한다. 이야기는 일상의 소소한 것들을 다루는 척 하지만, 사실은 인간 마음속의 거친 풍랑을 그려 나간다. 그 격랑의 물결 안에는 살의(殺意)가 있다. 그것도 모성의 살해 욕구. 바로 그 점이 섬뜩하게 만든다. 많은 여자들, 많은 남자들이 마음속을 들킨 것 같고, 그것을 헤집어 놓은 것 같아 못내 찝찝하면서도 겁이 난다. ‘어떻게 알았을까? 사람들이 내 마음속 진심을 어떻게 눈치 챘을까’하는 마음이 된다.

 

대학에서 비교문학을 가르치는(것처럼 묘사되는) 여성 레다(올리비아 콜맨, 젊은 시절 역은 제시 버클리)는 그리스의 외딴 섬에 외따로 여행을 왔다. 일종의 워킹 홀리데이다. 조용한 곳에서 홀로, 아무의 방해도 받지 않고 연구하고, 쉬고 할 생각이다. 레다는 올해로 마흔여덟이다. 그러니 이제 이럴 때도 된 셈이다.

 

레다가 묵는 레지던스를 30년 동안 관리해 왔다는 남자 라일리(에드 해리스)는 점잖기 그지없고, 해변에서 바텐더로 일하는 윌(폴 메스칼)은 귀엽기 그지없다. 게다가 윌은 더블린에서 경영학을 전공하는 학생이다. 아픔이 있든, 과거가 있든, 그런 건 다 나중 얘기고 아무튼 지금은 좋다. 레다는 오랜만에 편하고 아늑한 느낌을 얻는다. 해변에서 수영복 차림으로 비치파라솔 그늘에 앉아 자신의 연구 과제를 들여다보는 것만큼 행복한 것도 없다.

 

 

그러나 일상은 늘 누군가에 의해 균열되기 마련이다. 레다에게 그것은 니나(다코타 존슨) 집안의 출현이다. 같은 지역의 고급 빌라(핑크색이다. 천박하다)를 통째로 빌려, 대가족이 여름휴가를 즐기는 니나 집안은 바텐더 윌의 말에 따르면 ‘나쁜 사람들’이어서 얽히면 좋을 것이 없다. 문제는 니나의 어린 딸이 해변에서 갑자기 사라지는 일이 발생하고, 레다는 아이를 찾아 주게 되는데 이번엔 그 딸이 애지중지하는 인형이 없어져서 집안에서는 실종 포스터까지 붙일 지경이 된다. 그 인형은 누가 가져갔을까.

 

레다는 아이를 키우고 달래는 것에 허덕이다 신경질적이 된, 거의 우울증 증세까지 보이는 젊은 여인 니나를 지켜보면서 자신의 젊은 시절을 회상한다.

 

지금은 각각 25살, 23살이 된 딸 비앙카와 마사를 키우는 과정에서 레다는 자신이 이루려는 학문적 성취와 육아 사이에서 큰 갈등을 겪었다. 알베르 카뮈의 얘기대로 철학적 욕구와 개인의 욕망은 일치할 수가 없다. 레다는 끊임없이 징징대고 울어대는 아이들을 ‘죽여 버리고 싶을 만큼’ 힘들어 했다. 그녀는 그래서 엄마로서는 있을 수 없는 짓을 저질렀다(고 그녀는 생각한다) 그 죄의식에서 레다는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아 왔다. 한때의 잘못된 선택이(라고 할 수 있을까?) 어쩌면 엄마라는 인생의 굴레에서 평생을 벗어나지 못하게 한 셈이다.

 

 

영화는 3단 케이크를 얹듯 이야기를 펼친다. 젊은 여인 니나가 겪는 육아의 고통, 그리고 과거의 레다가 겪었던 육아의 모습, 그리고… 그리고… 바로 그 인형. 사라진 인형. 어쩌면 사라진 도터(딸)와 같은 맥락의 인형. 모성은 아름답고 순수의 극치이며 영원불변하다는 말은 어쩌면 다 하는 소리이다. 실로 어쩌면 단순한 ‘개소리’일 수 있다. 오랜 가부장 사회의 남성들이 붙여 놓은 환각의 수사학이며 여성들을 모성애 안에 가두려는 수작질에 불과할 수 있다. 육아는,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자신의 갖고 있는 증오의 본질을 배우는 것과 같다. 미친다는 것, 그 광기의 경계가 어디인지를 확인하는 길이기도 하다.

 

젊은 레다는 견딜 수가 없었다. 아이 둘에 따른 속박을 이겨 낼 재간이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하고 싶어 하는 비교문학을 위해서도 끊임없이 이탈리아어를 외워야 했고 다른 언어도 공부해야 했다. 하지만 아이들이 가만히 놔두지를 않았다. 너무 피곤해서 잠깐 조는 것까지 아이들은 허용하지 않는다. 레다는 칭얼대는 비앙카를 견디다 못해 자신이 어머니로부터 받은 귀한 인형을 창문 밖으로 던져 버려 박살을 낸다. 아이를 침실에 가두려는 과정에서 유리창을 깨뜨리기도 한다. 레다는 이러다 스스로 폭발하게 될 것이라는 위기감을 느낀다. 그러다 레다는 일상의 숨통을 트이게 할 있는 학회에 참석하게 되고 거기서 하디 교수(피터 사스가드)를 만나 걷잡을 수 없는 궤도 이탈을 경험하게 된다.

 

레다는 무슨 사건이나 강제적인 무엇으로 인해 ‘로스트 도터(딸을 잃었다)’한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딸을 잃는 과정을 겪었고, 그러다 자신 스스로까지 잃어버린 셈이 됐다. 레다는 끊임없는 과거 기억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데다 툭하면 어지럼증을 겪는다. 온전한 정신과 육신이 아니다.

 

 

매기 질렌할의 카메라는, 레다의 마음속을 유영하며 그녀가 겪는 부당하면서도 불공정한 죄의식의 정체를 캐내려 애쓴다. 레다는 아이가 잃어버린 인형을 몰래 보살피는데, 인형 안에 물이 차 있었던 탓인지 입에서 지네가 빠져 나올 때 소스라치게 놀라고 만다. 인형의 뱃속에서처럼 레다의 뱃속에도 흉측한 과거의 악령이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얘기이다. 니나는 그런 레다의 배를 말다툼 끝에 긴 바늘로 찌르고 간다. 레다의 배에서 슬며시 배어 나오는 핏자국은 인형의 몸속에서 나온 지네의 흔적과 닮은꼴이다.

 

아이가 어른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는 살부(殺父) 욕구와 살모(殺母) 욕구를 느낀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과정에서 여성들은 끊임없이 ‘이 아이를 왜 낳았을까’, ‘이 아이가 없어졌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 아이가 죽어 버렸으면 좋겠어’한다. 육아의 고통은 그에 앞서 오랜 기간 만들어지고 교육으로 강제된 모성애의 인내심을 뛰어 넘는다. 그러니 그 마음속 욕망을 누가 탓할 수 있겠는가.

 

‘로스트 도터’는 변화하는 여성성과 더불어 변화하는 모성성에 대한 얘기를 하는 영화이다. 아이가 최우선이기 이전에 한 명의 여성이 먼저이다. 여성이 있어야 모성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종, 아니 거의 매번, 모성애를 통해 여성은 올바른 주체의 인간으로 거듭나기도 한다.

 

여성과 모성. 그 경계에서 늘 갈등하고 방황할 수밖에 없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고, 그렇게 잘 알고 있음에도 우리는 늘 출산과 육아를 선택한다. 질곡(桎梏)이다. 영화는 마치 그 차꼬와 수갑을 차고 있는 것마냥 보는 사람들의 심사를 꽉 억누른다. 매기 질렌할은 그 일관된 답답증의 연출에 일가견을 보인다. 사랑과 결혼, 출산과 육아는 실로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삶이 그렇다. 인생을 산다는 건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이탈리아 나폴리 출신의 세계적 작가 엘레나 페란테의 소설 ‘잃어버린 사랑’을 원작으로 한 영화다. 소설의 문체가 흘러가듯 묘사한 글의 마력을 매기 질렌할이 영상으로 옮겨 내려 했다. 영화를 읽게 만든다. 그 서술의 능력을 보여 준 작품이다.

오동진 ccbbkg@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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