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진의 언제나, 영화처럼] 이제 다들, 그만하고 퇴근하세요

2022.07.28 09:37:14 10면

77. 멋진 세계 - 니시카와 미와

 

일본 니시카와 미와의 신작 ‘멋진 세계’의 로그 라인(스토리의 항해 일지. 전체 스토리를 두세 줄로 요약하는 것)은 이것이다.

 

“13년간 감옥에 복역했던 전직 야쿠자 미카미가 출소한다. 그는 새롭게 살 결심을 하지만 변화된 사회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매번 트러블을 일으킨다.”

 

로그 라인만으로는 영화가 어째 민망해 보인다. 매우 올드하게 느껴진다. 일종의 갱생(更生) 영화이다. 이런 영화, 1970,80년대에 흔하게 나오던 것들이다. 시작과 끝이 뻔한 내용들이다. 게다가 주인공 미카미(야쿠쇼 코지)는 자꾸 가슴을 움켜잡는다. 협심증이 있는 모양이다. 이것도 어째 끝이 뻔해 보인다. 그러니 이건 물어보나 마나 신파이다.

 

제목 ‘멋진 세계’가 내포하는 반어(反語)적 의미도 전형성의 대표급이다. 내용은 절대로 멋진 세계를 그리지 않는다는 의지의 표현이고 이 세상이 멋질 일 없다는, 구질구질한 일 투성이라는 점을 강조하려는 처사임을 드러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멋진 세계’를 이상한 흡입력으로 종종 훌쩍대다가, 때로는 낄낄 거리며 보게 되는 이유 역시 바로 그 전형적이고 뻔한 신파의 줄거리를 들었다 놨다 하는 주인공 역의 야쿠쇼 코지 때문이다.

 

 

코지는 미카미의 복잡한 심내(心內)를 시종일관, 꾸준한 한 톤(tone)으로 끌고 나간다. 미카미는 허리를 90도로 접는, 폴더식 인사를 하며 세상의 눈치를 보다가도 한 순간 눈을 까뒤집고는 소리소리 지르며 자신이 예전에 ‘좀 나갔던’ 깡패였음을 증명하려 애쓴다.

 

그 분열의 성정, 이러지도 저러지도, 어쩌지 못하는 사람의 심정을 천연덕스럽게 표현해 나간다. 이 영화 ‘멋진 세계’가 좋아진 유일한 이유는 순전히 야쿠쇼 코지 때문이며, 코지에게 그런 연기를 연출한 니시카와 미와 때문이다.

 

미와 감독은 이 영화에서 다른 건(스토리, 촬영 등) 모두 낙제점 가까운 것을 받았지만 주인공 연기 연출 하나로 그 모든 걸 보상해 냈다. ‘멋진 세계’는 미카미란 남자 때문에 볼 만한 영화가 되고, 들어 봄직한 내용의 영화가 된다. 영화는 때론 이렇게, 철저하게 버릴 건 버리고 취할 건 취해야 하는 예술이다.

 

주인공 미카미는 극 중에서 세 번 운다. 그런데 그중에서 첫 번째 울음이 이 영화에 대한 모든, 낮은 기대치를 반전시킨다. 미카미는 출소 직후 도쿄에 와 자신의 모든 것을 전적으로 믿어 주는 일종의 ‘멘토 부부’를 만난다. 당연히 그들은 그에게 따뜻한 식사 한 끼와 그날의 잠자리를 제공한다. 멘토 부부의 아내는 미카미에게 이것저것 먹을 것을 권한다. 남편은 그런 아내에게 미카미가 갑자기 따뜻한 음식을 많이 먹으면 탈이 난다며 핀잔을 준다. 부부의 그런 대화를 들으며 일본식 스키야키 고기를 한 점 집어 먹으려는 순간 미카미는 왈칵 울음을 터뜨린다. 식탁 건너 멘토 아내의 목소리가 들린다. “아이고 이를 어째.”

 

 

이 장면은 니시카와 미와 감독이 의도한 것보다 훨씬 더 잘 나온 것일 가능성이 높다. 이런 장면의 연출은 ‘테이크’를 반복해서 가기가 어렵다. 배우가 감정을 반복해서 똑같이 유지하기 힘들 것이고 한 번 울었다가, 좀 쉬었다가, 똑같은 장면을 다시 찍을 때 다시 같은 울음의 종류를 만들어 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배우는 기계가 아니며 연기는 공장에서 찍어내는 상품이 아니다. 이런 장면은 테이크 원으로 한 번에 오케이가 났거나, 테이크 원을 살려 놓고 두 번 정도 더 찍었을 것이다. 그만큼 영화 ‘멋진 세계’는 배우 야쿠쇼 코지의 노련하고 원숙한 연기에 의존했고, 그를 신뢰했으며, 그의 메소드 연기에 전적으로 의존한 작품이라는 얘기인데 그게 완벽하게 성공한 작품이라는 얘기이기도 하다.

 

바로 그 점이 작품이 갖는 신파의 전형성을 더욱 깊게 만들어 내게 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작품의 수준을 높게 만들었다. 이왕 신파이려면 확실한 게 좋다. 니시카와 미와 감독이 선택과 집중을 한 부분은 바로 그 ‘깊이’이다. 신파의 깊이.

 

두 가지 지점에서도 이 영화는 음미할 부분이 있다. 한때 번창(?)했던 야쿠자 조직이나 그 수하의 깡패들도 이제 정말 별 볼 일 없어졌음을 보여 주는데 그건 어쩌면 일본의 구시대, 일본식 구체제의 몰락을 보여주려는 의도처럼 느껴진다.

 

미카미는 고향 후쿠오카에 있는 조폭 친구의 집에 초대를 받는다. 복잡한 심사도 식힐 겸, 사실은 다시 조직 일을 해볼까 하는 마음도 살짝 있다. 하지만 야쿠자답게 굵은 목소리를 내며 통 큰 척하는 친구는 이미 한쪽 발이 잘린 상태다. 그것도 칼부림을 하다 그런 것이 아니다. 어처구니없게도 당뇨 때문에 다리를 잘랐다. 그런 그를 보살피는 아내(처럼 보이는 여자)가 오히려 여장부 스타일이다.

 

정원에는 온몸 등판에 야쿠자 문신을 한 중늙은이가 막일을 하는 중이다. 아내란 여자가 그 남자를 향해 소리친다. “이제 그만하고 퇴근하세요.” 야쿠자도 출퇴근하는 정원사(급도 안 되는 노동자)가 됐다. 이들에게는 이제 과거의 영광 따위란 없다. 시대는 변했고 그들 역시 갱생을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과하고 늘 용서를 구하는 마음이어야 한다.

 

 

니시카와 미와 같은 일본의 영화적 지식인들은, 일본의 과거 군국주의와 지금의 일본식 후진적 정치와 사회를 영화의 미카미처럼 복구하기 어려운 갱생 전과자처럼 인식하고 있음을 느끼게 해 준다. 일본의 사회도 늘 경계에서 왔다 갔다 하는 마음일 수 있다.

 

그들의 폭력적이고 저급한 정치는 세계에 누를 끼쳤고 무엇보다 일본 국민 스스로에게 죄를 저질렀다. 일본 사회는 갱생하기 위해 늘 사죄하는 마음이어야 하지만 한편으로는 한때 잘 나갔을 때의 심정이 되곤 해서는 고래고래 잘났다고 소리 지르고 싶어지기도 한다. 마치 미카미처럼. 그 복잡한 마음 때문에 미카미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듯 니시카와 미와도 종종 그렇게 울음을 터뜨리는 심정일 수 있다. 바로 그 점을 고백하고 있는 것 같은 영화이다.

 

한 전과자의 모습을 통해 기이하게도 일본 사회의 몰락과 그 와중을 느끼게 해 준다는 점에서 ‘멋진 세계’는 특별할 수 있다. 멋있게 살아왔다고 생각하는 순간 주변은 이미 멋지지 않아진 지 오래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번 멋지게 살아 보자고, 그래서 다시 행복해져 보자고 소망하는 영화이다. 일본 사회가 정상으로 가보자고 소망하는 영화이다. 이상하게도 그 정치성이 느껴진다. 믿거나 말거나이다. 해석은 자유이다. 관객의 몫이다.

오동진 ccbbkg@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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