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진의 언제나, 영화처럼] 동림은 누구인가. 아웅산의 진실은 무엇인가

2022.08.04 11:00:58

78. 헌트 - 이정재

 

한 남자는 무의미한 전쟁을 막으려 하고, 한 남자는 학살의 역사를 끊어내려 한다. 두 사람의 목적은 다른 듯 사실은 같다. 두 남자는 원수지간이지만 알고 보면 동지일 수 있다. 두 남자는 상대가 제5열(국가를 붕괴시키려는 내부 비밀집단)의 수괴라고 생각한다. 상대가 나를 잠입자로 생각하는 걸 나는 알고 있고, 그걸 알고 있는 나를 상대가 알고 있고, 다시 그걸 내가 아는 식이다. 거울 속의 거울과 그 거울 속의 거울 이야기가 바로 ‘헌트’이다.

 

누가 역사 앞에서 선이고 악인가. 누가 옳고 누가 잘못된 것인가. 동림이라는 이름의 조직 내 두더지는 두 남자 중 누구인가. 혹시 둘 다인가. 아니면 둘 다가 아닌가. 영화 ‘헌트’는 격렬한 하드보일드 액션으로 두 사람의 정체를 향해 냅다 돌진해대기 시작한다.

 

배우 이정재가 놀랄만한 연출 역량을 선보인 영화 ‘헌트’는 극이 2/3까지 진행될 때만 해도 박평호(이정재)와 김정도(정우성) 둘 중 누가 잠입자인지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둘 모두 무슨 음모에 휘말려 있고, 그래서 간첩이 저 중 누구일 거라고 관객 한 사람 한 사람 확신하게 만든다. 하지만 반전이 있다. 무엇보다 ‘헌트’의 얘기는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싸구려가 아니다. 영화에는 매우 큰 반전이 도사리고 있으며 그것은 자기가 생각했던 내부 첩자가 뒤집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보다 더 큰 전복이 도사리고 있다. 사람들로 하여금 영화의 마지막 순간까지 이 이야기가 어떻게 끝이 나게 될지 짐작할 수 없게 만든다.

 

 

더욱더 깜짝 놀라게 되는 것은 이 영화의 모티프이다. 한국 영화는 지금까지 무수한 장벽을 넘어왔고 수많은 장애물을 극복해 왔지만 그럼에도 넘지 못했던 이야기가 세 개가 있다. 하나는 문세광 저격 사건이고, 하나는 KAL기 폭파 사건의 진상과 실체이며, 또 하나는 버마 아웅산 테러 사건이다. 이 세 가지에 대해 한국 영화계는 그간 엄두를 내지 못했다. 아직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가 많기 때문이다. 많은 점들이 비밀에 싸여 있기 때문이다. 여전히 한국사회를 휘감고 있는 레드 콤플렉스와 반공 이데올로기 때문이다.

 

그런데 ‘헌트’가 그 지점을 통과했다. ‘헌트’의 이야기는 아웅산 테러 사건에서 가져왔다. 그 점이야말로 이 영화가 실로 놀랍게 느껴지게 만든다. ‘헌트’는 물론 가상의 역사이다. 1983년 미얀마 아웅산 국립묘역에서 테러가 일어나기 직전과 직후까지의 영화 속 얘기는 모두 허구이기 때문이다. 장소도 미얀마가 아니라 태국으로 바꿨다. 모든 얘기는 거짓일 것이다. 그러나 보는 내내 ‘저런 일들이 있었겠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개연성이 매우 높게 느껴진다.

 

영화는 그 개연성으로 역사를 재해석하게 한다. 그리고 그 재해석으로 역사의 실체에 접근하게 만든다. 그러기 위해 씨줄 날줄의 시나리오를 엮어 낸다. 영화는 결국 영화지만 그래서 결국 영화만의 얘기는 아닐 거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비현실의 현실성, 현실의 비현실성이라는 변증을 완성시킨다. ‘저건 영화의 얘기일 뿐이야’라고 생각하면서도 저런 얘기가 충분히 현실에서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비현실의 현실성이다. 반면에 너무 드라마틱해서 진짜 벌어진 일도 가공의 얘기처럼 느껴진다. 현실의 비현실성이다. ‘헌트’가 그 두 가지 모두를 실현시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헌트’는 아웅산 사건을 전면으로 내세우지 않는다. 아웅산 얘기이면서도 아웅산 얘기가 아니고, 그렇게 아닌 게 아닌 것처럼 느끼게 만들었다. 그 시선의 다양성을 하나의 텍스트 구조로 완결해 냈다는 점에서 ‘헌트’는 놀라운 작품이다.

 

 

1983년 국가안전기획부는 국내 팀과 해외 팀으로 나눠 운영된다. 국내 팀의 수장은 김정도(정우성)이다. 해외 팀은 박평호(이정재)가 맡고 있다. 1983년의 한국은 지독한 독재정권이 자신의 권력기반을 공고히 하기 위해 살인과 고문을 일삼는, 온갖 더러운 짓을 서슴지 않던 때였다. 안기부는 그 하수인 중의 하수인 노릇을 했다. 당연히 권력자에 대한 암살 시도가 진행된다.

 

국내 팀과 해외 팀은 업무 범위가 각각 다르지만 상황이 상황이니 만큼 그 역할이 교차될 때가 많다. 예컨대 독재자가 미국 순방을 갔을 때 같은 경우이다. 독재자는 권력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미국으로부터의 지지를 끌어내려한다. 그래서 늘 미국을 제일 먼저 간다. 영화 속 주한 미국대사는 이런 얘기를 두 번이나 한다. “우리가 원하는 건 질서요.” 어쨌든 이 워싱턴 D.C 순방길에 해외 팀과 국내 팀은 공조를 한다. 그리고 암살 위기 직전, 감청 중인 미국 CIA 덕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암살 팀을 좌절시키는 데 성공한다.

 

박평호와 김정도 둘은 이 암살의 배후에 북괴(당시에는 북한을 이렇게 불렀으며 지금도 종종 사용되는 단어이다)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대통령의 동선이 노출된 데에는 자신들의 조직 안에 ‘내부자’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둘은 그 정체의 이름이 ‘동림’이라는 것까지는 파고 들어간 상태다. 둘은 서로를 ‘동림’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싸움은 남과 북, 안기부와 북한 대남전략부가 아닌 안기부 내 제5열을 밝히려는 ‘자신들 안’의 싸움으로 전환된다. 적은 늘 내부에 있다. ‘헌트’는 그 진실의 전형성을 가장 전형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추적해 간다. 그 서스펜스가 사람들을 움찔거리게 한다. 초긴장 상태로 몰아넣는다.

 

 

워싱턴 D.C 암살 음모를 분쇄해 가는 ‘헌트’의 오프닝 시퀀스는 스크린을 좁혔다 넓혔다, 들었다 놨다 하며 압도적으로 장면 하나하나를 끌고 나간다. 박평호는 안기부 경호 차량 뒷좌석에 앉아 있고, 밖에서는 워싱턴 교민들의 반정부 시위가 벌어지고 있는 중이다. 이들의 ‘각하’가 어디선가 회담 장소인 호텔로 오고 있는 중이며, 김정도는 호텔 안에서 데모 군중을 보며 초조해하는 중이다.

 

어디선가 저격수가 준비 중인데, 북한 작전 팀인지 아니면 제3의 누구인지는 알 수가 없다. 호텔 내부에서는 CIA 감청 팀이 감청 내용을 실시간으로 분석 중이다. 오프닝 시퀀스는 이 네 가지 공간, 박평호의 호텔 외부, 김정도의 호텔 내부, 저격 팀의 시점 숏, CIA 감청 팀의 모습을 번갈아 보여주며 긴장도를 점층적으로 높여 낸다. 데모 군중들의 인서트 컷들이 그런 긴장을 계속 높아지게 한다.

 

이러한 높은 밀도감은 극 후반부 권력자가 태국의 국립묘역에 참석하는 장면에서 똑같은 호흡과 리듬으로 반복된다. 그러나 마지막 장면은 동어의 반복이 아니라 극의 정점을 치기 위해 보다 상승된 형태로 나타난다. 마치 TNT가 폭발하는 느낌을 준다. 극의 오프닝 씬에서 극의 클로징으로 가는 과정이 단계적으로 차곡차곡 서스펜스를 쌓아가는 방식으로 구성돼 있다. 그 치밀함과 디테일이 놀라울 정도로 빼곡하다. ‘헌트’가 이뤄낸 일은 이야기의 정밀성이다. 여름 한국영화 시장에 이만한 수준의 시나리오는 ‘헤어질 결심’과 이 ‘헌트’ 딱 두 편이다.

 

 

아웅산 테러 사건이 무엇인지, 1983년의 전두환 정권이 어떤 일들을 자행했는지 등등을 알고 보면 더욱 흥미가 있을 영화이다. 아웅산은 미얀마 수도 랑군에 있는 아웅산 장군의 묘역을 말한다. 아웅산 장군은 미얀마의 독립을 위해 투쟁한 투쟁가이며 현 아웅산 수 치 여사의 부친이다.

 

1980년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은 초기 권력기반의 정당성 확보를 위해 순방 외교를 강화했으며 아웅산 행도 그 일환이었다. 그러나 북한이 미리 심어 놓은 특작대가 폭탄 테러를 감행해 서석준 부총리, 이범석 외무부 장관, 김재익 경제담당 수석비서관 등 각료 17명이 사망했다. 전두환은 4분 늦게 도착해 구사일생으로 살았다. 이 사건 이후 국내에서는 안기부 국내 팀의 첩보로 전두환 일당은 북한의 테러 작전을 미리 감지하고 있었고, 이를 국내 정치의 정국 전환용으로 활용하기 위해 묵인했다는 설이 파다했었다. 전두환은 자신의 각료를 대거 죽이거나 숙청하려던 참이었다는 얘기까지 나왔다.

 

하지만 그 진실은 베일에 가려졌다. 북한의 특작대 일부도 잡지 못한 채 북한으로 다시 도주하는 일까지 벌어졌지만 그 이유 역시 밝혀진 게 없다. 전두환 철권통치는 이 일로 정당성을 얻었다. 한국사회에서는 고문과 폭력이 정당해졌다. 1983년의 한국은 역사상 가장 암울했던 때이다.

 

배우 이정재와 정우성이 이렇게 놀랄만한 역사적 식견을 지니고 있었을 것이라고 예상 못했을 것이다. 이정재가 이런 영화의 감독을 이런 식으로, 이렇게 수준 높은 방식으로 해내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신세계’, ‘무뢰한’, ‘아수라’ 등 선 굵은 영화들만 만들어 온 ‘사나이 픽쳐스’의 대표이자 제작자인 한재덕과 정우성, 이정재가 공동대표인 ‘아티스트스튜디오’가 공동으로 제작한 작품이다. 그래서 한가락한다는 배우들이 모두 단역이나 카메오로 나온다. 이웅평 역의 황정민은 그중 압권이다. 박성웅, 주지훈, 조우진, 김남길이 한 컷 혹은 한 씬 정도로 나온다. 그것만으로도 놀라운 작품이다. 한국 영화가 또 다른 지점을 통과해 내고 있다. 찬사를 보내는 바이다.

오동진 ccbbkg@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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