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행 칼럼] 민중자서전

2022.08.17 06:00:00 13면

 

 

누구나 알고 있으나 제대로 알지 못하는 우리의 치부가 폭우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서울 관악구와 동작구 반지하에서 각각 살던 장애인 가족 3명과 50대 기초수급자 여성이 불어난 비를 피하지 못하고 숨진 것이다. 소중한 생명을 앗아간 원흉은 집중호우지만 실은 반지하다. 그들이 반지하가 아닌 지상 1층에만 살았더라도 물난리로 어이없이 죽었을 리는 없기 때문이다.

 

외신은 한국의 반지하에 방점을 찍었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에서 중요한 배경인 반지하가 이번 폭우로 맨얼굴을 드러냈다고 보도한 것이다. 그런 비정상적 주거 형태는 세계에서 한국 밖에 없을 것이라고 부연했다. 한국의 반지하(지하 포함) 주택은 32만7320가구(2020년 통계청 인구총조사 자료)로 대략 62만여 명이 반지하에 살고 있다는 통계도 덧붙여졌다.

 

윤석열 대통령은 검정 구두를 신고 반지하를 내려다보았고, 오세훈 서울 시장은 반지하 주택을 없애겠다고 야심찬 계획을 세웠다. 인재(人災) 속에서, 정치지도자들의 영혼 없는 모습이 겹쳐지면서 비로소 얼굴이 드러난 사람들은 누구일까? 이들의 얼굴이 과연 있기는 있는 걸까?

 

지난 80년대 뿌리깊은나무의 한창기 선생은 민중자서전 시리즈를 통해 얼굴 없고, 목소리 없는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생생하게 등장시켰다. 일본의 한 출판사가 번역 출간했을 정도로 이 기획은 국내외에 신선한 충격을 던졌다. 1981년부터 10년간 모두 20권을 펴냈는데 말로 풀어 낸 것을 전혀 고치지 않고 그대로 담아 가히 민중자서전이라 할 수 있다.

 

벌교 농부 이봉원 씨의 자서전 일부를 보자. “그전이는 인자 흔트모, 흔트모, 기양 방 골래서 여윽 꽂고, 여윽 꽂고, 여윽 꽂고, 그릏곰 기양 막 슁겨 나가. 기양 멍체이 모로 싱궜어. 기양 아믛게나 강골라서 차꼬 모 싱군 사람덜이 인자 방 골래서 꼽아, 항클방클허니.”(‘그때는 고롷고롬 돼 있제’, 73쪽.) 예전에는 못줄을 쓰지 않고 모를 심었기 때문에 논이 삐뚤빼뚤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인데 부사 등을 많이 써서 상황을 묘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목수, 옹기쟁이, 보부상, 진도 강강술래 앞소리꾼, 뗏사공, 설장구잽이, 농사꾼, 고수…밑바닥 사람들의 삶이 그 누구도 아닌 자신들의 입말을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난 예는 역사적으로 극히 드문 예가 아닌가 한다. 바로 이 대목이 이번 폭우 속에서 숨진 반지하 사람들을 뉴스를 통해 접할 때 크게 다가왔다. 그들의 구체적인 목소리를 들을 수 없어 더욱 안타깝고 답답했던 것이다. 그들의 일상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들은 어떤 작은 꿈들을 꾸었을까?

 

앞서 제시한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반지하에 사는 사람들 숫자는 대략 경기 안산시(7월 기준 64만 8,164명 거주) 인구 정도다. 이는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전하고, 정치권에서 약자를 받들겠다는 소리가 요란해도 밑바닥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처지는 오히려 후퇴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그렇기에 40여 년 전 이 땅을 살아가는 사람들과 그들의 문화를 사랑한 사람에 의해 세상에 나온 민중자서전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민중자서전, 양적으로만 치닫는 우리 사회의 치부를 비춰주는 거울 아닐까?

이건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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