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진의 언제나, 영화처럼] 자라투스트라는, 아니 라쉘은 이렇게 말했다

2022.08.18 13:45:58 10면

80. 임파서블 러브 - 카트린 코르시니

 

눈이 밝은 관객이라면 영화 ‘임파서블 러브’ 속 남자 필립(닐 슈나이더)이 여주인공 라쉘(비르지니 에피라)에게 니체 얘기를 할 때 알아 봤을 것이다. 필립은 라쉘에게 이렇게 얘기한다.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어 봐. 없으면 내가 갖다 줄게.” 필립은 모르는 것이 없다. 외국어도 몇 가지를 하는지 모를 정도다. 그는 통역과 번역 일을 한다는데, 심지어 중국어까지 구사한다. 키가 크고 잘생겼다. 25살의 노처녀(1950년대 당시)인 라쉘은 그런 그에게 홀딱 빠져 든다.

 

그런데 문제는 조로아스터, 곧 자라투스트라이다. 니체의 자라투스트라 사상에 빠져 있는 이 젊은이는 전통과 권위의 기존 질서를 깨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그것을 자신의 여자, 자신의 연애관계에까지 적용하려 한다.

 

게다가 니체 사상의 핵심은 초인 사상이다. 그건 한때 히틀러가 ‘애용’하던 것이기도 하다. 자유로운 척, 그리고 기독교적 관습과 윤리의식을 깨부수는 척, 또 다른 폭력적 권위의 질서를 만들어 내려했던 히틀러처럼 필립은 모든 사물과, 모든 연애의 감정과, 모든 여자의 순애보적 감성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고 착취하려 한다. 이건 결국 한 여자의 삶을 짓밟는 쪽으로 나아간다. 니체와 히틀러, 그리고 반 유태인 정서가 그를 휘감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게다가 그는 ‘진짜’ 부유한 집안의 자식이다. 필립은 라쉘에게 말한다. “너하고 연애는 해. 너를 사랑해. 우리는 특별한 관계야. 그러나 결혼은 안할 거야. 이건 나의 신념이야.” 이런 말을 하는 남자가 대체로 그렇듯이 필립이 원하는 것은 오로지 섹스이다. 욕정의 배설이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이중, 삼중의 인격을 가진 이 남자를 순진한 라쉘이 사랑한다는 것이다. 그저 사랑하기만 한다는 것이다. 이 남자가 나를 정말 사랑할까 생각하면서도 끝없이 그를 향해 몸과 마음을 열어 준다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 남자의 아이를 밴다. 비극은 이때부터 본격화되기 시작한다.

 

눈이 좀 더 밝은 관객은 극 중반쯤 필립이 한 번의 육체적 유희와 광풍이 지나간 후 침대에 누워 라쉘에게 자신이 1년 반 동안 감옥에 갔었음을 고백하는 장면에서 이 남자의 위악성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그는 전쟁 중 징집을 피하기 위해, 아는 사람의 도움을 받아 독일에 가 있었고 거기서 어떤 일을 했다는 것이다. 명백한 부역 행위다. 그가 감옥에 갔었던 건 전후에 부역자들을 징벌하는 과정 때문이었을 것이다. 필립의 집안이 프랑스 내 나치주의자들과 연결돼 있음을 보여 준다.

 

 

근무지 발령을 핑계로 라쉘을 떠난 필립은 부정기적으로 그녀 앞에 나타나 섹스만 하고 홀연히 떠나기를 반복한다. 그 사이 딸아이 샹탈(제니 베스)을 낳은 라쉘은 싱글 맘으로 살아가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녀의 목표는 단 하나. 필립과의 정상적인 생활도 생활이지만 무엇보다 샹탈의 호적을 그의 집안에 귀속시키는 것이다.

 

아이의 신원증명서에는 친부 불명이라는 꼬리표가 붙어 있고 그 점이야 말로 그녀를 가장 괴롭히는 일이다. 라쉘은 이 일로 필립과 다투지만 그렇다고 본격적으로 친자소송을 하든지 하는 식은 아니다. 매달리는 식이다. 필립은 결국 아이의 호적을 자신에게 옮기지만 딸아이가 고등학생이 되고나서부터 더더욱 끔찍한 짓을 벌이게 된다.

 

마치 모파상이 쓴 ‘여인의 일생’을 다시 읽는 듯한 느낌을 주지만 그것은 서사의 방식 때문이지 서사의 목표나 그 내용이 같아서가 아니다. 여인의 삶은 늘, 굉장히 기구한데, 라쉘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여성들의 지난 삶이 실로 순탄치 않았으며 그건 지금도 그리 다르지 않다는 점을 느끼게 해 준다.

 

여성이 여성으로서, 그리고 인간으로서 해방되기 시작된 것은 50년이 채 되지 않았으며 그건 지금도 완성되지 않았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딸 샹탈은 끔찍한 일을 겪었고, 그것 때문에 엄마 라쉘을 미워하고 경멸하기도 했지만 결국 그런 그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한다.

 

그건 자각한 여성이 아직도 가부장의 질서의식에서 벗어나 있지 못한 여성을 향한 관용이자 연대의 심정 같은 것이기도 하다. 많은 ‘그녀’들이 여전히 깨닫지 못하는 삶을 사는 이유는, 여전히 시스템이 그렇게 작동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녀’들에 대한 ‘의식화 작업’이 제대로 이루어진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샹탈은 엄마 라쉘을 앉혀 놓고 이렇게 얘기한다. “엄마는 총체적으로 거부당했어. 그걸 총체적 거부라고 해. 가진 게 없는 사람이었고 유태인이었어. 게다가 여자였지. 엄마가 이렇게 된 것, 내가 이렇게 된 것은 바로 그 총체적 거부 때문이야.” 그리하여, 여성이 여성의 문제를 깨뜨리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의 자구적 노력만이 아니라 사회와 정치, 계급 문제가 병행돼 해결돼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성의 의식이 여기까지 왔을 때 진정한 여성 해방의 단초가 마련되기 시작할 것이다.

 

더더욱 눈이 밝은 관객은 두 젊은 남녀, 필립과 라쉘이 데이트를 하면서 보는 영화가 ‘사형대의 엘리베이터’이며 영화 속 극장 안 스크린에 잔 모로의 얼굴이 보일 것이다. 루이 말 감독이 1959년에 발표한 작품이다. 이 영화 ‘임파서블 러브’의 이야기가 1959년에 시작된다는 것을 알게 해 준다. 배경이 되는 공간은 샤토르라는 프랑스 중부 도시이다. 화염병과 돌멩이가 격렬하게 오갔던 파리의 6·8혁명도 여주인공 라쉘은 피해 있었고 그만큼 세상에 대한 인식에서 괴리돼 있었음을 보여 준다.

 

‘임파서블 러브’는 오랜만에 만나는 전통 서사의 드라마이다. 텍스트가 그렇게 어렵지는 않다. 한 여인의 기구한 일생을 죽 따라가면 된다. 영화는 마치 여인의 일생이 주된 이야기인 척 그리고 있다. 그러나 의식 있는 관객이라면 이건 마치 막심 고리키의 ‘어머니’ 같은 얘기임을 깨닫게 된다. 자각한 사람만이 세상을 올바로 이해하고, 또 그럼으로써 세상을 구하게 된다.

 

한 여인이 자신이 여성이라는 이름으로 우뚝 서기까지, 지금껏 인류는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임파서블 러브’는 구체성의 변증법으로 보여주려 한다. 그 점이야말로 이 영화에 대해 놀라게 되는 이유다. 경이롭다. 텍스트를 통해 콘텍스트로 나아가게 만든다. 이야기가 스스로 정치화되고 여성주의화 한다. 이야기가 스스로 캐릭터화 되고 그 캐릭터가 다시 이야기를 확장시킨다.

 

여주인공 역의 비르지니 에피라가 25살에서 65살의 연기를 해낸다. 폴 버호벤 감독의 영화 ‘베네데타’에서 풍만한 가슴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던 수녀원장이었다고는 생각하지 못할 만큼 뛰어난 연기 스펙트럼을 선보인다. 그만큼 카트린 코르시니 감독의 연출력이 정교했다는 뜻일 것이다.

 

세상을 구하는 것은 모성이다. 모성의 힘이다. 모성의 진정한 힘은 여성에게서 나온다. 여성주의가 인류를 구원할 것이다. ‘임파서블 러브’의 주제이다.

오동진 ccbbkg@naver.com
저작권자 © 경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흥덕4로 15번길 3-11 (영덕동 1111-2) 경기신문사 | 대표전화 : 031) 268-8114 | 팩스 : 031) 268-8393 | 청소년보호책임자 : 엄순엽 법인명 : ㈜경기신문사 | 제호 : 경기신문 | 등록번호 : 경기 가 00006 | 등록일 : 2002-04-06 | 발행일 : 2002-04-06 | 발행인·편집인 : 김대훈 | ISSN 2635-9790 경기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Copyright © 2020 경기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kg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