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진의 언제나, 영화처럼] 지옥에서 살면서 천국을 꿈꾸지 말라

2022.11.03 11:37:16

87. 와일드 이즈 더 윈드 - 파비안 메데아

 

실연(失戀) 같은, 개인적인 관계에 문제가 생기면 대중가요의 가사가 다 자기 얘기처럼 들린다고 한다. 사회적이거나 정치적인 이슈가 커지면 영화의 내용이나 그 안에 나오는 대사가 다 지금의 얘기를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예컨대 이런 대사다. 두 남자가 이런 얘기를 주고받는다.

 

“존, 이곳에 희망이 있다고 생각해? 우리가 과연 증오를 극복할 수 있을까?”

 

“극복? 맙소사. 심오한 질문이네. 그래. 우리가 피를 많이 흘리긴 했지. 하지만 난 너를 형제라고 생각해. 믿는 건 너뿐이야. 그거면 됐어.”

 

존이라고 불리는, 질문을 받은 남자는 백인(프랭크 라우텐바흐)이다. 질문을 한 남자는 흑인이다. 이름은 부쉬(모더시 마가노). 여기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한 지방 도시이며, 요하네스버그 근처 소도시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국제 러시안 갱들과 연결된 마약 매춘 조직이 활개를 치고 있는 곳이다. 우범지대는 (백인들이 늘 주장하는 대로) 흑인 하층민 거주 지역에 위치해 있고, 모든 사건 사고는 (흑인들의 주장대로) 흑인들에게만 덮어 씌워지기 일쑤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아파르트헤이트, 곧 인종차별정책이 공식적으로 없어진 때가 1990년 드 클레이크 백인 대통령 때이니 그로부터 30년 넘는 세월이 지났다. 1990년에 무려 27년간 수감생활을 하던 아프리카 민족회의(ANC)의 흑인 지도자 넬슨 만델라가 석방이 됐고, 1994년에는 그가 남아프리카 공화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30년이 지난 현재이니, 이 사회, 다 된 것 아닌가? 정상적인 사회가 되고도 남은 것이 아닐까? 그러나 두 남자의 대화를 들어 보면 아직 멀어도 한참 먼 모양이다. 아직 주변에 극복하지 못한 문제투성이가 있는 듯해 보인다.

 

 

영화 ‘와일드 이즈 더 윈드’는 넷플릭스의 위대한 장점, 곧 다국적인 영화를 다국적의 언어로 여과 없이 직접 감상할 수 있게 해 주는, 종(種) 다양성의 영화 편성에 따라 최근에 공개된 작품이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영화이다.

 

‘와일드 이즈 더 윈드’는 이 나라가 (놀랍게도) 여전히 과거 역사의 큰 상처와 거기서 기인한 여러 정치 사회적 갈등, 경제적 분쟁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양 진영 간 증오의 논리가 너무 팽팽한 모양이고, 이상하게도 그것이 우리의 현실과 그리 차이가 없어 보인다. 아니 꼭 우리 얘기 같다. 저 나라는 흑백의 싸움이 여전하고 지금 여기, 이 나라 한국은 진보와 보수의 싸움이 끝을 안 보이고 더욱더 깊어지고 있다는 것만이 차이라면 차이다.

 

저 멀리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만들어진, 영어와 변형된 네덜란드어(아프리칸스라고 불리는 언어, 이른바 보어인들의 언어), 줄루어가 뒤섞인 영화를 보면서 공교롭게도 바로 우리 자신들의 얘기를 반추하게 되는 건 참으로 기이한 경험이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은 여기나 저기나, 지구의 반대편에서 살아가거나 살을 부대끼며 바로 옆에서 살아가거나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영화는 종종, 아니 아주 자주, 불편한 현실을 공유하게 함으로써 이상한 방식으로의 정신적 연대의 길을 찾아가게 만든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는 여전히 차별이 존재하고, 그것이 대체적으로는 경제적인 갈등, 빈부격차와 양극화에서 비롯되고 있는 바, 지구 여느 곳과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다만 그 정도의 차이만 존재할 뿐이다. 우리나 아프리카나 과거의 식민지 압제를 벗어나 정치적 해방을 얻긴 했으나 경제적 차별 문제, 곧 자본주의 양극화가 모든 사회 문제의 발목을 잡고 있는 셈이다. 아직 사람들은, 여기나 거기나, 진정으로 해방되지 못했음을 보여 준다.

 

 

‘와일드 이즈 더 윈드’는 흑백 파트너 형사인 부쉬와 존이 주인공이다. 그런데 이 둘이 파트너가 된 것도 처음엔 다분히 인위적이고 인공적인 정책의 발상에서 비롯된 것일 가능성이 높다. 공공기관이 먼저 이렇게라도 모범을 보여서 흑백 갈등 문제를 좁혀 보겠다는 취지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존의 표현대로(“믿는 거 너뿐이야”) 둘은 어느덧 형제 같은 사이가 됐다. 그렇게 된 데에는 둘이 뇌물을 받아 살아가는 부패 경찰이기 때문이다. 둘은, 고속도로나 국도에서의 속도위반 차량으로부터 작은 돈을 받는 정도의 하급 부패경찰이 아니다. (그것도 돈을 직접 받는 사람은 흑인인 부쉬이다. 둘은 계급상 상하 관계로 존이 약간 높다) 둘은 작정과 작당을 하고 다량의 마약을 지니고 있는 흑인 하부 갱 조직을 급습하기까지 한다. 이 둘은 범죄자이긴 해도 어쨌든 흑인 셋을 죽이기까지 해서 마약을 빼앗는다. 한탕 크게 친다. 큰돈을 벌 요량이다.

 

부쉬는 더 이상 차별받는 삶과 가난이 지긋지긋해서(사랑하는 아내는 곧 출산을 앞두고 있고 거실에 있는 TV를 바꿔야 하지만 돈이 없어서 그러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백인 경찰 존은 자신의 농장을 은행에 차압당할 위기에 처해 있었기 때문이다. 둘은, ‘모두들 다 해 처먹고 사는 세상에서’ 자신들이라고 그러지 말고 살라는 법은 없지 않느냐는 생각에 이른 상황이다. 부패와 불의, 악을 공유하면 처음엔 공고한 신뢰가 쌓인다. 서로가 서로의 뒤를 봐줘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도 철저하고 세밀하게.

 

하지만 부패로 쌓은 관계는 결코 오래가지 못한다. 부쉬는 나중에 존의 얼굴을 갈기며 이렇게 얘기한다. “결국 드러내는구나. (너희 백인들의) 본색을.” 존은 그런 부쉬를 상관의 권리로 정직시키고 나중엔 공무집행 방해죄를 적용해 수갑까지 채우려 한다.

 

 

두 흑백 남자의 앞에는 마약범들을 강탈한 강도 공범이라는 문제가 놓여 있지만, 동시에 18세 백인 여자 아이가 잔인하게 살해된 사건까지 함께 수사해야 할 처지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흑인 아이가 수없이 살해되는 일에는 언론이나 정치권이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백인 여자 아이가 강간당한 채 살해당하면 지역사회가 들끓는다. 그리고 마치 당연한 듯이 흑인 용의자를 잡아들인다. 존과 부쉬, 부쉬와 존은 이 문제를 놓고 자신들이 지닌 피부 색깔의 정체성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영화 ‘와일드 이즈 더 윈드’의 이야기는 남아프리카 사회의 중층(重層) 모순을 풀어내려고 애쓴다. 공식적으로는 차별 정책이 폐지됐지만 30년 넘게 이 사회 속에 뿌리 깊게 배어 있는 흑백의 갈등 문제를 축으로 정치권의 오랜 부패, 경제적 양극화, 만연돼 있는 강력 범죄 등등 수많은 문제가 3단 케이크 혹은 4단 케이크 마냥 겹겹이 쌓여 있음을 보여 주려 한다.

 

죽은 백인 소녀와 잡혀 온 흑인 용의자는 놀랍게도 연인 사이이다. 백인 여자아이는 지역사회에서 주요 인사인 중산층 아버지를 둔 학생이고, 흑인 남자아이는 글도 못 읽는 문맹의 빈민 청년이다. 당연히 범죄 조직과도 가까울 수밖에 없다. 지금의 남아프리카 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는, 아니 그보다는 있어선 안 되는 관계이다.

 

 

전체 인구의 15%에 불과한 백인 사회가 전체 인구의 75%에 이르는 흑인 사회를 지배하는, 불평등의 나라에서라면 필연적으로 문제를 일으킬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남녀 아이의 사랑이 결실을 맺을 수 있게 됐었다면 아마 남아프리카 사회는 조금씩이나마 좋아질 희망을 나타냈을 것이다. 그건 두 흑백 형사 존과 부쉬가 보여 주었어야 할 사회적 시그널과도 같은 맥락이다. 두 관계는 묘한 대구를 이룬다.

 

존은 ‘부쉬, 너만 있으면 됐다. 그거면 됐다’고 말하지만 그건 다 허망한 착각이었을 뿐이다. 두 청춘 남녀의 비극만큼 두 형사의 비극은 이 영화가 무엇을 얘기하려 하는지, 또 무엇을 아직도 얘기하지 못하고 있는지를 보여 준다.

 

영화는 현재 남아프리카 사회가 처한 비극을 나열하는 반면에 아직은 감히 희망을 논하지는 못한다. 그래서 영화는 몹시 답답하고 우울하다. 제목으로도 알 수 있듯이(정통 영문법에 의거해서 형용사의 느낌을 강조하기 위해 문장을 도치시킨 것이다. 원래 문장은 더 윈드 이즈 와일드이다) 바람이 아주 거칠고 황량하다. 아직은 따뜻하고 포근한 바람이 불 때가 아니라는 것이다.

 

짐작하겠지만 영화 ‘와일드 이즈 더 윈드’는 뛰어난 작품이 아니다. 이런 류의 걸작으로 꼽히는 1962년 영화 ‘알라바마 이야기’, 하퍼 리 원작의 소설 ‘앵무새 죽이기’의 수준에는 못 미쳐도 한참을 못 미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이국적인 작품에서 기이한 동질성을 느끼게 된다는 점에서 눈여겨 볼만한 작품이다. 현재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도 사회적 시선이 뾰족한 영화들이 만들어지고 있고, 영화가 이렇게 세상 곳곳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목소리를 내고 있음을 보여 주고 또 실천하고 있어 슬프지만 반가운 작품이다. 지옥에서 살면서 천국을 꿈꾸면 안 된다. 당신만 힘들어질 뿐이다. 영화 속 갱단의 행동대장 같은 이가 하는 말이다. 그것 참 묘하게도 동의가 된다. 파비안 메데아란 이름의 감독이 만들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영화인으로 기억해야 할 이름이 샤를리즈 테론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오동진 ccbbkg@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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