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윤의 좌충우돌] 상상력(想像力)에게

2022.11.18 06:00:00 13면

 

우리 부모님은 툭하면 싸우셨다. 다정한 대화는 지리멸렬한 싸움으로 끝났다. 시시비비는 폭언이 되고 폭언은 폭력이 되었다. 그 광경을 일상처럼 지켜보던 어린 날들, 너는 내게 유일한 친구이자 놀이였다. 엉뚱하고 호기심 많은 나는 언성이 높아지면 너의 세계로 숨바꼭질하듯 숨곤 했다. 거기서는 뭐든 할 수 있었다. 네 뒤에 숨어 현실의 고통을 이리저리 피했다.

 

수 년 후 부모님은 갈라서기로 했다. 그러자 이제는 누가 아이들을 키울 지로 다투기 시작했다. 양육권을 서로 가지려는 아름다운 싸움 따윈 없었다. 이혼 소송 기간 아빠와 엄마의 고향을 짐짝처럼 오갔다. 도시에서 어촌, 농촌으로 또래들과 친해질 새 없이 전학을 다녔다. 낯선 환경에 적응하기도 전에 버스에 실려 어딘가로 옮겨가야 하는 단조롭고 지루한 세상을 네게 기대어 버텼다.

 

장난감도 딱히 없던 시절 나는 사물에 너를 입혀 놀았다. 쓰임새 없는 막대기도 너는 왕자와 공주로 변신시켜 로맨스 가득한 세계로 나를 데려가 주었다. 시외버스로 장거리 이동을 할 때면 차 창 밖 굽이굽이 끝없는 산들을 너는 거대한 무덤이라 했다. 그러면 정말 거인이 긴 잠에서 벌떡 깨어나 저벅 저벅 걸어오는 것 같아 긴장감에 숨죽였다. 어떤 겨울날 슬픔에 젖어 울고 있을 때 너는 고개 들어 밤하늘 별을 보라고 했다. 날개를 활짝 펴고 날아가는 슈퍼맨-오리온이었다. 내가 널 지켜줄게. 내게 말 건네는 것 같았다. 을씨년스러운 겨울 오리온이 있으면 무섭지 않았다. 어두운 밤길도 씩씩하게 걸을 수 있었다.

 

너는 일종의 생존방식이기도 했다. 자라면서 현실에서 부딪히는 벽만큼 고통도 커졌다. 악당 같은 이가 호되게 꾸짖어도 네가 있어 속상하지 않았다. 돌아서 그가 문턱에 발이 걸려 넘어지는 장면을 떠올리며 피식 웃고 말면 그뿐이었다. 악담을 퍼붓는 이가 있어도 다가오는 말들이 먼지처럼 흩어지는 이미지를 그리면 그걸로 됐다. 너를 쓸모없다 불온하다 말하는 이도 있었지만 너로 인해 나는 좀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었다.

 

존재와 인식의 세계를 넓히며 내 호기심과 함께 너는 “사회적 상상력想像力”으로 변해갔다. 너는 나 중심에서 벗어나 타인의 입장에 서보는 일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지 일러주었다. 타인의 삶과 고통의 크기를 가늠하며 공감과 이해를 배웠다. 서로가 연결되어 상생하는 삶의 기쁨도 알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너를 부여잡고 머릿속으로만 그리던 일들을 현실에서 이루고자 했다. 감성이 더해지고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생기면서 꿈꾸는 대로 현실을 만들어 가려 애썼다. 너는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드는 힘이었고 나를 이끌어 경계를 넘나들었다.

 

너를 만나는 동안 사유의 깊이도 더해져 스스로 짊어지던 짐을 내려놓기 시작했다. 사회가 그려놓은 인간상에서도 해방되었다. 주어진 삶의 궤도에서 벗어나 끝없이 현실 너머 세계를 그렸다. 너를 잃은 채 성장했더라면 나는 주어진 조건에서만 기계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밋밋하고 따분한 어른이 되었을 거다. 내 인생에 가장 큰 사건은 너를 만난 일이었다. 상상력想像力, 너로 인해 나는 삶을 붙들고 최선을 다했다.

박영윤
저작권자 © 경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흥덕4로 15번길 3-11 (영덕동 1111-2) 경기신문사 | 대표전화 : 031) 268-8114 | 팩스 : 031) 268-8393 | 청소년보호책임자 : 엄순엽 법인명 : ㈜경기신문사 | 제호 : 경기신문 | 등록번호 : 경기 가 00006 | 등록일 : 2002-04-06 | 발행일 : 2002-04-06 | 발행인·편집인 : 김대훈 | ISSN 2635-9790 경기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Copyright © 2020 경기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kg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