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진의 언제나, 영화처럼] 보지 못한 진실, 보려 하지 않은 진실, 그 비극에 대하여

2022.12.01 12:16:20 10면

91. 올빼미 - 안태진

 

영화는 명백히 이야기 설정이 어떠한가에 따라 대중적 성공, 예술적 평가가 갈린다. 그건 어떻게 보면 백남준의 작품을 판단하는 기준과 같다. 누구나 생각할 수 있지만 누구도 생각할 수 없는 아이템으로 작품을 만드는 사람, 우리는 그들을 아티스트라 부른다.

 

영화 ‘올빼미’는 그런 ‘씨네아스트(cinéaste)’의 탄생을 알리고 예고하는 작품이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을까.

 

‘올빼미’는 조선 16대 왕 인조 때의 이야기이다. 인조는 26년간 조선을 통치했고 영화 속 사건, 곧 소현세자의 죽음은 인조실록 23년 때의 일이니 1645년이 배경이다. 사건을 겪고 인조는 우리 햇수로 4년, 곧 1649년에 사망한다. 앞선 사건이나 인조의 죽음이나 실록은 간단하게 처리한다.

 

그래서 알고 보면 매우 미스터리하고 수상쩍다. 감독 안태진의 착안이 시작된 것은 바로 이 부분이다. 역사의 공식기록인 실록조차 소현세자의 죽음을 독살 아닌 독살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누구의 짓인지는 밝히지 않는다.

 

영화 ‘올빼미’는 600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 그 진실을 명확하게 밝히되, 그 방법을 목격자의 증언에 따른 것으로 찾아내는 식이다.

 

문제는 그 목격자란 인물이 맹인 침술사라는 것인바. 다만 낮에는 못 보지만 밤에는, 특히 완전한 어둠 속에서는, (약간이나마)보이는 주맹증(빛이 없어야 보이는 시각장애) 환자라는 것이다.

 

그런 인물이 과연 역사 속에 실재했을까. 그런 것은 중요하지가 않다. 사건의 본질은 다른 데에 있다. 무엇보다 사건의 행동 동기는 무엇이었을까. 사건의 근원, 경악할 만한 진짜 범인은 누구였을까.

 

 

주맹증이란 신소재의 조건 때문에 영화 속 사건은 매우 복잡해진다. 과연 주인공 침술사가 본 것은 정말 ‘본 것’인가. 그가 보지 않은 것은 무엇이고 진짜 본 것은 무엇인가. 세상을 살면서 눈을 뜨고 봐야 할 것은 무엇이며 차라리 눈을 감고 보지 말아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본다는 것 그 자체는 무엇인가. 많은 상념이 영화를 보는 내내 사람들의 가슴을 휘몰아친다.

 

미천한 집안 출신으로 침을 잘 놓는 경수(류준열)는 어의 이형익(최무성)에게 발탁돼 궁으로 들어가게 되고, 곧 그의 침술 능력을 인정받게 된다. 병자호란으로 청(후금)에 인질로 잡혀 갔던 소현세자(김성철)가 돌아오고 궁 안과 바깥세상의 분위기에 긴장감이 흐른다.

 

서인으로 보이는 최 대감(조성하)은 세자와 손을 잡고, 혹은 세자의 등에 업혀, 조선의 권력을 잡으려 한다. 어쩌면 소현과 최 대감은 조선과 세상을 개혁하려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청을 통해 변화한 문물을 접한 세자와 아직 친명적 이념의 가치를 지닌 인조(유해진)는 세상을 바라보는 인식에서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만성 기침에 시달리는 세자는 종종 침술 치료를 받곤 하는데, 어느 날 밤 경수는 어의 이형익이 세자에게 독이 묻은 침을 놓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경수는 곧 이 사실을 세자빈 강씨(조윤서)에게 알리지만 사건은 이상한 방향으로 일파만파, 전혀 생각지도 못하는 방향으로 번져 나간다. 그리고 그의 목숨이 일각에 처하게 된다. 경수는 진짜 범인을 세상에 알리게 될 수 있을까. 무엇보다 왜 이런 일, 이런 언어도단의 일이 발생하게 된 것일까.

 

조선 27대 왕 가운데에서 인조는 가장 무능하면서도(병자호란, 삼전도의 굴욕) 교활한(인조반정, 광해군 폐위) 왕으로 꼽힌다. 그가 그렇게 불리는 데는 왕권의 정통성을 거의 인정받지 못한 데 따른 것이고, 그 같은 정권을 유지하는 데 급급해 재위 26년을 허비했기 때문이다.

 

인조는 오로지 가문의 복수를 위해 멀쩡했던 왕을 몰아내고 스스로 왕이 된 인물이었다. 정통 왕권에 도전해 쿠데타를 일으킨 인물인 셈이다. 그가 북악산 기슭 홍제천에서 일군의 반정 세력, 무사들과 칼을 씻고 뒤로 삼각산을 넘어 창덕궁을 친 일화는 유명하다.

 

광해군은 그의 아버지 정원군(원종)의 이복형으로, 한때 능양군으로 불렸던 인조는 자신의 큰 아버지를 ‘친 셈’이 된다. 선대의 왕 선조는 두 명의 왕비와 6명의 후궁을 두었으며 광해군과 인조 모두 후궁의 핏줄로 태어난 자식이다. 인조가 광해를 제거할 때 뒀던 명분은 그가 선조의 두 번째 정실인 인목왕후와 그녀의 자식 영창대군을 죽였다는, 일종의 친족 살해 혐의였다.

 

 

그러나 그 본질은 수많은 자식을 둘러싼 권력승계 문제로 야기된, 더 깊게는 신하들과의 권력 분점 문제로 야기된 당파 싸움이 원인이었다. 당시 조선은 서인과 동인으로 나뉘어 ‘피 터지게’ 싸웠으며, 동인은 다시 남인과 북인으로 나뉘었고, 북인은 다시 소북파와 대북파로 나뉘었다. 서인은 훗날 노론과 소론으로 갈린다.

 

어쨌든 인조의 옹립은 대립세력이었던 서인과 남인이 오로지 광해군을 끌어 내리고자 하는 목적의 일시적인 연합으로 가능해진 것이었다. 왕의 자질보다는 이 같은 권력 구조의 다툼을 잘 알았던 능양군, 곧 인조는 정쟁을 활용해 왕위에 오른 인물에 불과했던 것이다.

 

영화 ‘올빼미’가 출중한 것은 이 같은 거대담론의 줄기를 거의 드러내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이른바 영화적 추론으로 당시 시대를 짐작하게 하고, 진실의 아우라에 접근하게 한다.

 

영화는 이형익이 소현 세자를 독살하고 침술사 경수가 그것을 목격하게 되면서부터 서스펜스(극적 긴장감)의 롤러코스터를 탄다. 우리는 이제 범인이 누군지를 다 알고 있다. 관객 모두에게 범인의 음모가 만천하에 드러났는데, 영화 속 주요 인물들만이 그걸 모른다. 관객들은 영화를 보면서 손에 땀을 쥐게 된다. 주인공에게 어서 도망가라고, 빨리 진실을 알아채라고 속으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게 된다.

 

 

안태진이 뛰어난 감독이라는 것은 그 같은 서스펜스의 정통 기법을 인조실록의 몇 줄 안 되는 기록으로 구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조선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전쟁의 폐허를 딛고 중흥과 새로운 도약을 맞이할 수 있었던 거의 유일한 기회가 소현세자의 등장이었다. 그러나 당시 시대는 그것을 걷어찼다. 조선이 다시 반짝, 기회를 얻은 때는 정조에 이르러서였다. 효종과 현종, 숙종, 경종, 영조 등 5대를 거친, 100년을 훨씬 지나서이다.

 

‘올빼미’가 폭로하고 있는 것은 사건의 실체와 범인에 있기도 하지만 시대를 허송세월한 권력 찬탈의 비극, 권력의 정통성이 부재할 때 빚어지는 참극에 대한 진실이다.

 

‘올빼미’는 보려 하지 않는 것과 그저 보게 되는 것, 그리고 의지를 가지고 보려 하는 것에 대한 영화이다. 곧 무지(無知)와 인지(認知), 인식(認識)의 차이에 대한 영화이기도 하다. 무지에서 인지로 건너가는 길은 어렵다. 많은 지식을 알아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지에서 인식으로 가는 길은 더욱 더 험난하다, 알게 된 것을 실천을 통해 자기화, 내면화 해야 하기 때문이다. 개인이든 전체든 모든 변화의 시작은 인식의 행위에서 비롯된다. ‘올빼미’는 조선조 16대 왕 때 벌어진 일을 ‘인지’함으로써 지금의 사회를 ‘인식’하고 그런 수순으로 세상을 바꿔 나가자고 역설한다. 이 얼마나 오묘한 행위인가. 실로 감탄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안태진의 등장을, 곧 새로운 한국영화의 시대를 목격하는 당신은 야맹증인가 주맹증인가. 지금처럼 권력의 정당성이 입증되지 못하는 시대를 살아가는 당신은 영화의 주인공이 한때 그랬던 것처럼 보지 못하는 것인가, 아니면 보지 않으려 하는 것인가. 어둠 속을 잘 살펴야 할 일이다. 진실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오동진 ccbbkg@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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