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진 칼럼] 체감 온도 영하 48도의 한국

2022.12.26 06:00:00 13면

 

미국 미네소타주가 영하 48도라는 뉴스가 전해진다.. 미네소타라면 미시간 5대호 옆에 붙어 있는 미국 최북단 도시이다. 워낙 추운 곳이긴 해도 영하 48도는 아무래도 정상이 아니다. 그렇다면 롤랜드 에머리히의 영화 ‘투모로우’가 현실화됐다는 얘기다.

 

물론 ‘투모로우’가 기후변화에 의한 재난을 그린 내용만은 아니다. 내 기억엔 이 영화는 부상(父性)의 가치, 아버지의 역할에 대한 얘기를 그린 작품이기도 하다. 모든 사람들이 메릴랜드 워싱턴D.C. 밑으로 밑으로 피난을 가려할 때 아버지 잭(데니스 퀘이드)은 아들 샘(제니크 질렌할)을 구하기 위해 뉴욕주의 뉴욕인지(컬럼비아 대학이었는지) 매사츄세츠의 보스턴인지(보스턴 대학이었는지)로, 그러니까 북으로 북으로 향한다는 이야기이다. 잭의 아내인 의사 루시(셀라 워드)는 그의 북상이 죽으러 가는 길일 수 있음을 알면서도 남편을 떠나보낸다. 아들을 꼭 구해 올 것을 믿는다면서. (가서 우리 아들 구해와!, 하는 것 같았다.) 난 그 옛날 이 영화를 처음 볼 때 그 장면이 꽤나 의미심장하게 보였다.

 

당시 2004년은 9·11 테러 여파가 심했을 때였다. 롤랜드 에머리히는 이 '얼척(어처구니)없는' 상업재난영화를 통해 놀랍게도 '아들을 구하는 아버지=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는 지도자(대통령)'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던 것 같았다. 진짜 아버지. 진짜 지도자란 어때야 하는 가를. 한 마디로 부시 대통령을 ‘돌려 까기’로 비판한 셈이다.

 

우리가 주로 할리우드 영화만을 편향적으로 볼 수밖에 없었을 때(지금은 넷플릭스 같은 OTT 때문에 아이슬란드 영화, 남아공 영화, 베트남 영화, 아르헨티나 영화 등등을 그들의 자국어로 볼 수 있는 시대가 됐다.)에조차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정치적 올바름을 지닌 작품들이 적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이래저래 문제가 많은 대형 자본주의 국가이긴 해도(예컨대 트럼프 같은 인물을 배출한 나라이긴 해도) 미국이 200년 넘게 민주주의의 가치를 숙성시켜 온 나라인 만큼 자본만 우대하는 내용의 영화보다는 그 자본이 낮은 계급에게도 나뉘어질 수 있는 사회에 대해서도 그리는 영화를 많이 만들어 온 덕이다. 당연히 지배계급, 지배층의 도덕성과 그 ‘지배계급 다움’에 대해 얘기하는, 곧 우파의 진정한 가치에 대해 얘기하는 작품들이 적지 않았다는 얘기다. 그런 것이야 말로 바로 할리우드의 진짜 힘이다.

 

랜달 월레스 감독이 만든 2002년 영화 ‘위 워 솔저스’도 마찬가지다. 이 영화는 미군이 최초로 남베트남에 지상군을 파견, 첫 전투를 치르는 이야기다. 1965년 북베트남 정규군의 지원을 받는 베트남 남측 게릴라(흔히 베트콩이라 불리는)와 벌어진 전투였고(아이드랑 계곡 전투) 미국이 서서히 베트남 전을 본격적으로 확대하기 시작했음을 보여 준 사례였다. 미군은 할 무어 중령(멜 깁슨)까지 395명, 베트콩은 2천명에 육박했지만 서로의 일전을 제대로 겨룬 전투였다. 영화에서도 할 무어와 베트콩의 지휘관은 서로의 전투 실력, 병력 운영 및 전술에 대해 감탄을 금치 못한다. 서로는 서로가 만만치 않은 상대임을 깨달으며 이 전쟁이 결코 쉽게 끝나지 않을 것임을 깨닫는다. 영화는 양측 지휘관에 대한 그 톤앤매너가 특출한 작품이었다. 국가 간 전쟁에서든 삶의 전반적 영역에서든 ‘아버지 같은 지휘관=지도자’가 중요하다는 메시지가 전해졌다. 역시 당시의 부시 대통령을 ‘돌려 까기’하고 있음을 드러낸 영화였다.

 

할 무어 중령이 전투에 투입되기 직전 연병장에 병사들을 모아 놓고 연설을 하는 대목은 이제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다. 국민의 힘 유승민 의원이 지난 대선 경선 때 써먹어서 어떤 이들은 속으로 ‘기특하다’고까지 생각했었다고 한다. 보좌관이 나쁘지 않군, 이라고 봤다는 것이다. 할 무어는 연설에서 이런 얘기를 한다. “나는 여러분보다 전장에 가장 먼저 발을 디딜 것이고 여러분 보다 전장에서 가장 나중에 발을 뗄 것이다.” 지도자의 연설은 이쯤이 돼야 한다. 육화(肉化)된, 체화된 이념과 정신이 있어야 꽤나 감동스러운 어휘를 자연스럽게 구사할 수가 있는 법이다.  

 

이런 영화들을 생각하면 작금의 한국은 기가 막힌 일이 한둘이 아니다. 이태원에서 애들이 안타깝게 참사를 당한 걸 가지고도 ‘애들 시체팔이 해서 돈벌려고 한다’는 극우 파시스트들의 난동에 가까운 시위가 이어진다. 게다가 그들을 은근히 지원하는 지도층, 지도자 부부가 득실거린다. 미국이 현재 실제로 영하 48도이긴 해도 한국은 체감 영하 48도인 곳이라는 얘기다. 그게 더 춥다. 시쳇말로 피타고라스의 명언이 그런 게 있다는 것처럼 현재 한국은 답이 없는 나라가 됐다.

 

할 무어처럼 잘나기를 기대하지도 않는다. 할 무어처럼 하바드 석사 출신의 지적인 지휘관이나 지도자를 꿈꾸는 것도 아니다. “거버먼트 인게이지먼트가 레귤레이션이다” 같은 말은 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흔히들 보그체(패션잡지 보그의 기사가 영어가 뒤섞여 쓰일 때가 많아 생긴 신조어)라고 하는데 신세대들은 아예 ‘보그병신체’라 부르는 모양이다. 일국의 지도자가 이런 비아냥을 들으면 되겠는가. 아 춥다. 정말 추운 나라이다. 차라리 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가 되는 것이 낫겠다.  웬 ‘보그병신체’ 같은 글이란 말인가. 

오동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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