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에세이] 책 첫 페이지를 여는 마음으로

2023.01.18 06:00:00 13면

 

 

작달막한 체격에 허리 굽은 할머니가 날씬한 손녀의 손을 잡고 힘겹게 걷고 있다. 이른 아침 풍경이 한 폭 그림 같다. 그림 속에는 생명의 아침 빛이 저녁의 어둠과 함께 세월의 흐름까지 내포되어 있다. 인생이 이렇듯 흐르고 흘러서 죽음의 마지막 페이지로 향하는가? 그때 ‘메멘토 모리(memento mori)’가 생각났다. 라틴어 메멘토 모리는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이다. 2천 년 전, 로마 공화정의 개선식에서부터 비롯된 이 말은 아무리 기쁜 일이 있어도 언젠가는 죽는다. 겸손하게 행동하라. 는 오묘한 진리를 승리에 도취된 장군에게 하늘이 들려주는 소리로 여기도록 했다고 한다.

 

오늘날도 어느 탈옥수의 입에서 터져 나온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여전히 개연성을 갖는 사회다. 법은 선(善)을 떠나버린 세계에서 선의 대리자나 된 양 눈을 부릅뜨고 있다. 법(法) 좋아 하는 사람들, 금배지 패용한 분들부터 국군통수권자 어른까지 ‘죽음을 기억하시죠’라고 새해 덕담으로 들려주고 싶다.

 

새해가 시작된 지도 2주가 지났다. 캘린더 숫자의 시간은 흘러가는데 나는 어제와 같은 인간이고 일상은 지난해나 올해나 비슷하다. 청소년 시절에는 작가가 되겠다고 등용문을 두드리는 일부터 지리산 천왕봉에 올라 새해 일출 보기며, 아이들에게 부르게 할 ‘우리 집 노래’ 작사 등 꽤 바쁘게 보냈다. 그런데 지금은 꽃 같은 시절이야 누구나 가진 추억, 내게는 상처도 보물이었다. 상처가 깊으면 기억도 깊은 법을 체감하며 자위하고 있다. 남편 사랑이 부족하여 햇볕 부족한 음지 식물같이 시들시들 지내다가 저세상으로 건너간 가족 생각이 눈을 뜰 때부터 하루의 마지막 시간까지 이마에 얹혀 있는 것 같은 때가 많았다. 때문에 올해에는 교회에 가서 ‘새 기운/ 새로운 마음/ 일렁이는 바람으로/ 내가 나를 일으켜 세우자.’고 기도했다. 간단히 기도하고 마음 단속하며 나오는데 어디서 읽었던 ‘개가 개 같지 않아요’하는 탈북민의 말이 떠오른다. 개들이 너무 호사하는 것 같다는 말이다. 이와 비슷한 맥락의 이야기도 있다. 신앙 깊은 마나님이 신부에게 자기가 천당에 갈 때 사랑하는 개도 함께 가야 한다고 개에게 영세를 주도록 조르면서 안 된다면 개신교로 옮기겠다는 위협적인 행동에 설득되어 영세를 주었다는 유머 같은 이야기다. 개는 개처럼 살고, 나는 나답게 살아야 할 것이라는 뜻에서 새해에는 더욱 나를 깊이 성찰하며 살아가자고 마음 모았다.

 

새봄에는 아이들과 청보리밭 길을 걷고 싶다. 청보리밭 들녘의 바람 속에 아이들의 미래를 생각하면서 그리고 지금껏 살아온 대로 책 읽으며 글 짓는 가운데 미소가 최고의 보시오 수행이라고 웃으며 살고 싶다. 그동안 서점에서 구해온 책을 물티슈로 닦고 책 첫 페이지를 여는 순간 설렘과 기대감과 작은 긴장감이 따랐다. 작가와의 만남이 이렇게 이루어지듯-. 하루하루, 한 달, 일 년이 이렇듯 작은 설렘이길 소망하며 나의 길을 기꺼이 가고 싶다. 또 하나의 욕심이라면 코로나 시대로 마스크가 무기가 되고 패션이 되어 사람들 얼굴도 제대로 못 보고 살았다. 새해 2023년부터는 그리운 인연들과 마스크 없는 민낯을 마주하며 미소 짓는 그런 삶이길 간절히 소망한다.

김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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