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문재인 정부가 퇴임 때까지 추진했던 한반도 종전선언을 끝내 묵살했다. 북한도 사실상 묵시적으로 동의한 선언이 무산된 것이다. 하노이에서 열린 북미간 정상회담의 결렬과 종전선언 거부는 미국 국익에 부합되는 것이었다. 이 일련의 사태는 전쟁국가인 그들의 국익에 비춰 연속선 상에 있는 것이다. 군사 패권 정책에 매달려온 미 군산복합체 로비스트 존 볼튼(당시 국가안보보좌관)의 하노이 회담 참석에서부터 종전선언 거부는 예고된 것이나 다름 없었다.
해방 이후 미국의 한반도 정책은 일관된 것이다. 2차 대전 이후 동북아에 영토를 보유하고 있지 않은 미국은 일본을 점령한 뒤 소련에 대적할 강력한 동맹세력으로 키울 작정이었다. 이 전략을 추진하기 위해 전범국인 일본 대신 한반도의 분할이 이뤄졌고 남한에는일본을 지키는 최전방 군사기지로서의 운명이 주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한국전쟁을 계기로 미국 주도의 유엔군이 참전하면서 미국은 이승만의 간청으로 남한 군대의 작전권을 유엔군에 귀속시킨다. 이후 미국은 일본 및 남한과 각각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해 동북아 전략의 큰 구도를 완성한다. 남한이 배제된 채 미국과 북한-중국 사이에 체결된 정전협정에 따라 휴전 70년 동안 미군 사령관이 유엔군사령관 직을 차지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 이뤄진 것이다.
그러니 지금 남-북한과 미국이 종전 선언에 합의할 경우 미국은 큰 딜레마에 빠지게 될 것이 분명하다. 유엔군이 그 국제법적 지위를 상실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주한미군의 주둔도 명분이 크게 약화된다.
미국은 1980년대 말 냉전이 사라지고 옛 소련 연방이 해체된 상황에서 중국을 ‘새로운 적’으로 규정하고 전략을 수립했다. 그 전략에서는 한국이 미일 군사동맹의 하위 단위일 뿐이다.
한편 북한 핵은 기본적으로 공격 무기로 될 수 없는 모순을 지니고 있다. 핵으로 공격하는 순간 북한은 곧바로 자멸할 것이 분명하다. 문제는 미국이 북한의 핵 문제를 아이러니하게 잘 즐기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의 재정지출을 줄이면서도 중국 봉쇄와 한국, 일본의 군비증강에 좋은 땔감 구실을 해주기 때문이다.
종전 선언이 선포되는 순간 평화협정 체결 논의의 봇물을 누가 막을 것인가? 한반도의 평화구조 정착은 미국의 동북아 전략에 큰 차질을 빚을 수 있다. 미국의 동북아 전략이 근본적으로 수정되지 않는 현 단계에서 남북의 평화 정착은 쉽지 않다.
보통 국제정치학에서 평화 프로세스는 3단계를 거친다고 한다. 유지 단계에서 조성 단계를 거쳐 구축 단계로 이행해 간다는 것이다. 정전협정이 평화 유지의 첫 단계라면 평화협정은 적대 정책을 완화하고 군사적 신뢰를 구축하는 평화 조성 단계가 될 수 있다. 안정적이고 지속가능한 평화체제 구축의 수준까지 아직 갈 길은 멀다. 남북한 정부가 모처럼 평화체제 구축을 위해 한 목소리를 냈음에도 미국의 태도는 완강했다. 하지만 미국은 여론에 민감한 정치구조를 갖고 있다. 그런 만큼 전쟁 위기상황을 맞은 분단된 한반도 전역의 모든 시민들이 힘을 모아 미국의 대한반도 정책 전환을 외치는 수밖에 달리 길은 없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