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종준의 경기여지승람(京畿輿地勝覽)] 86. 제2로 직봉(直烽)-국가 지정 사적이 되다

2023.03.20 06:00:00 16면

국방을 위한 시설로 변방의 상황을 가장 빠르게 중앙 정부에 전달한 통신시스템
5가지 신호체계 조선 세종 때 제도적 완비...세계 최초 마이크로웨이브 시스템
약속된 신호규정에 따라 노선별로 작동하는 연속유산으로의 특이성

 

봉수(烽燧)는 국방을 위한 시설로서 변방의 상황을 가장 빠르게 중앙 정부에 전달했던 통신시스템이다. 밤에는 횃불(烽)로, 낮에는 연기(燧)로 변방의 군사정보를 중앙에 알림으로써 군민(軍民) 합동으로 이를 대비하게 했던 경보장치이다. 비가 오거나 흐린 날에는 화포나 북, 나팔 또는 깃발로 알리기도 하였고, 봉수군이 직접 달려가서 보고하도록 하였다.
 
연기를 피우는 데에는 솔잎, 쑥, 마른 소똥 등을 사용했는데 산에서 구한 이리 똥이 사용되기도 해서 낭화(狼火) 또는 낭연(狼煙)이라고도 하였다.

‘경국대전’에 보면 일상적인 평화로운 날에는 1개의 홰를 올리고, 적이 나타나면 2홰, 국경에 가까이 접근하면 3홰, 국경을 침범하면 4홰, 전투가 벌어지는 상황이 되면 5홰를 올리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5가지의 신호체계는 조선 세종 때 제도적 완비가 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통신 전문가들은 봉수의 다섯 가지 신호전달 체계를 세계 최초의 마이크로웨이브 시스템이라고 본다. 우리나라에서 TV방송을 시작할 때, 통신기지국 설치를 위해 일본의 기술자문을 받았는데, 이들이 가지고 온 자료가 우리나라 봉수 위치도였다는 것이다.

 

 
봉수제도는 오랜 옛날 영토전쟁이 벌어지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중국의 설화로 전해지는 봉수제도는 매우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해준다.
 
중국 서주(西周) 말기의 유왕(幽王)은 포사(褒?)라는 미인을 몹시 아끼고 사랑했지만, 이 여인은 도무지 웃지를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마침 봉홧불이 올랐고, 지방의 제후들이 군사를 이끌고 황급히 집결하는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을 보자 포사가 활짝 웃는 것을 본 유왕은 그녀의 웃음을 보려고 세 번씩이나 허위로 봉화를 올려 지방의 제후들을 모이게 하였다. 그런데 신후(申候)가 견융(犬戎)족을 이끌고 주나라를 공격해 왔는데, 유왕이 봉화를 올렸으나, 세 번씩이나 속은 제후들은 이번에도 장난으로 생각하고 모이지 않아 마침내 주나라는 멸망하고 말았다.

 

 

 

이 이야기는 사마천의 ‘史記’에 기록된 이야기이다. 서양의 동화 속에서 양치기 소년이 "늑대다"라고 장난쳤던 이야기를 연상케 한다. 한편, 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대의 침입을 임경업 장군이 설치한 봉수대의 봉수군이 충실하게 5개의 신호로 알렸지만, 도원수 김자점은 평화로운 세상의 민심을 어지럽게 한다고 봉수군을 처형하고 군사적 대비를 하지 않아 인조는 삼전도의 굴욕을 겪게 되었다.
 


평화로운 시대에 올리는 하나의 신호를 ‘평안화’ 혹은 ‘태평화’라 불렀고, 변방으로 귀양 간 가족이 있는 경우 매일 이 평안화를 보고 안도하였다. 광주 분원리 출신인 운양 김윤식(雲陽金允植)은 귀양지에서 1887년 섣달그믐날을 맞아 온갖 감회가 모여 들기에 장편의 시를 지으면서 귀양살이의 곤궁함보다는 새해를 송축하는 뜻을 담았다. 여기에 "산머리엔 날마다 평안한 불빛 보이고(山頭日見平安火)"라고 하였다.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는 봉화(烽火)라는 시에서


     미친 왜적 해가 지났는데 아직도 날뛰니 (狂賊經年膽未寒)
     언제쯤이나 봉화로 평안함을 알릴꼬 (幾時烽火報平安)
     멀리서 알겠노라 밤마다 이궁 밖에서 (遙知夜夜離宮外)
     기성(병조)의 낭관이 말을 세우고 고대함을 (騎省郎官立馬看)
 


봉수를 올리는 시설물을 봉수대(烽燧臺) 혹은 연대(煙臺)라고 하며, 우역(郵驛) 제도와 함께 1894년 전보통신이 도입되기 전에는 가장 빠른 통신수단이어서 부산에서 서울까지 약 12시간 만에 소식이 전달되었다. 봉수는 인편이나 역마를 이용하는 것보다 시간상 효율적이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봉수제도는 국가에서 관장하여 정치적, 군사적 통신을 목적으로 설치되고 운영되었으며, 백성이 개인적 민원으로 거짓 봉화를 올리면 처벌을 받았다.
 


우리나라에도 초기 국가 시기부터 봉수제도가 도입되었다. 가락국의 김수로왕이 허황후를 맞이하기 위해 유천간(留天干)과 신귀간(神鬼干)을 시켜 붉은빛의 돛을 달고 붉은 깃발을 휘날리는 배를 횃불로써 안내하였다는 기록이나, 온조왕 때의 ‘봉현(烽峴)’ 전투, 고이왕 33년(266)에 신라의 ‘봉산성(烽山城)’을 공격, 그리고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고양군 고적조에 고구려 안장왕 때 봉화를 올렸다는 기록이 있다.  고구려 제14대 봉상왕(烽上王, ?~300)의 왕호에도 ‘烽’자를 사용하고 있는데 옛날 임금은 무덤이 자리 잡은 지명으로 호칭을 붙였는데 봉상왕은 봉수대 위쪽에 묻힌 것이다.
 
조선시대에 와서 봉수제도는 전국에 큰 노선 다섯 개(5炬)의 직봉(直烽) 노선을 배치하고 그 직봉 노선을 서로 연결하는 간봉(間烽) 노선으로 연결하여 마치 거미줄처럼 전국을 통신망으로 연결하였다. 또한 바닷가에는 연대(煙臺)를 설치하고, 내륙에는 내지봉수 또는 복리봉수(腹裏烽燧)를 배설하였고, 서울 목멱산(남산)에서 전국의 봉수신호를 받아 병조(兵曹)에 보고 하도록 했다.
 


최근 제2로 봉수 유적이 국가사적으로 승격 지정되었다. 사적으로 지정된 데에는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중요성이 평가되었기 때문이다. 현재 남아 있는 봉수 유적은 조선의 군사 통신 제도를 뚜렷하게 보여줄 뿐만 아니라 조선왕조실록이나 경국대전, 그리고 각종 문헌의 기록과 부합되는 장소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확인되고 있어 그 역사성과 기록과의 일체성이 탁월하다.
  


또한 봉수신호는 서울까지 변방의 군사정보를 빠르게 전달해야 하기 때문에 북방 개척과 해변으로 쳐들어 오는 왜구를 방어하면서 터득한 지리적 정보의 결정체가 봉수 노선의 결정에 반영되었다. 그리고 봉수는 약속된 신호규정에 따라 노선별로 작동하는 연속유산으로의 특이성을 가지고 있으며 전국을 아우를 수 있는 연대성이 강한 문화유산으로서 추후 제1거, 제3거, 제4거, 제5거 노선에 대하여 북한과 합동조사를 통해 남북의 역사적 뿌리는 하나였음을 재인식하게 할 수도 있는 중요한 의미를 품고 있는 유산이다. 국가사적으로 지정된 봉수 유적 16곳 중 경기도 내에는 용인 석성산과 성남 천림산 봉수이다.

 

[ 경기신문 = 김대성 기자 ]

김대성 기자 sd1919@kg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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