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영금의 도시기행] 지방주의 온상 ‘함흥’

2023.04.28 06:00:00 13면

 

함흥 사람들은 유별나게 지역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다. 함흥 사람들은 평양과는 라이벌 관계라고 생각한다. 1980년대 건설된 함흥시 중심에 있는 함흥대극장은 평양대극장보다 더 크고 화려하게 건설해 비판을 받았다. ‘함흥얄개’ 또는 ‘함흥내기’로 부르는 함흥사람들은 군 생활이나 공동체 생활을 할 때에도 우두머리를 하는 경우가 많고, 나약함을 보이면 함흥사람이 맞냐는 의심을 받는다. 최고의 신부감으로 함경남도 지역 여성을 꼽으며 알뜰하고 생활력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래서 함흥하면 지역주의가 강하고 생활력 강한 여성들이 살고 있다는 이미지를 떠올린다.

 

‘지방주의 온상’이라는 말은 해방이후 생겨났다. 함흥-흥남지역은 산업시설이 많은 관계로 일제시기 노동운동이 활발했다. 1930년 흥남질소비료공장에서 저임금과 학대로 인한 최초 파업은 공장에서 일하던 여성들로부터 시작되었다. 화학공장에서 생산하던 질소는 전시에는 폭탄이 된다. 군수품을 생산하는 이곳에 사회운동가들과 문학가들이 거쳐 갔다. 해방 후 1945년 9월 19일 원산항으로 입국한 김일성은 각계정파들과 권력을 다투어야 했는데, 그 중 국내공산주의자였던 오기섭과의 노선투쟁은 이후 북한의 정치사에 영향을 주었다. 

 

오기섭은 1903년 5월 1일 함경남도 홍원에서 출생했다. 근로자의 날에 태어난 그는 출생일에 걸맞게 함남등지에서 노동운동을 하다가 13년동안 감옥살이를 했다. 해방당시 연설가인 오기섭의 인기는 김일성을 넘었다. 해방 후 첫 공산당조직인 북조선분국이 만들어질 때 오기섭은 제2비서로 선출되었다. 반면 김일성은 1945년 12월에 책임비서가 되었다. 오기섭은 북조선분국을 반대했을 뿐 아니라, 이후 노동의 성격문제로 김일성과 갈등을 겪었다. 

 

해방 후 노동운동의 성격을 규정하는 문제는 중요했다. 김일성은 노동조합이 국가와 기업에 적극 협조해야하는 것으로 규정하는 반면, 오기섭은 노동조합이 국가를 상대로 자신의 이익을 위해 투쟁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오기섭의 주장은 대중운동에 대한 가장 해로운 정치적 오류라는 지적을 받고 중앙상무위원이라는 직책에서 해임되었다. 그리고 김일성과 갈등을 겪었던 정치세력은 이후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가끔 북한에 어째서 폭동이 일어나지 않는가는 질문을 받게 되는데 그 줄거리를 찾다보면 ‘지방주의 온상’으로 거론된 함흥-흥남에 있다. 이로부터 북쪽은 노동자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국가를 상대로 싸우기보다 국가정책에 적극 협조하는 남쪽과 전혀 다른 정치문화가 시작되었다. 

 

북한문헌에도 자주 등장하는 함흥의 지역주의는 자연스럽게 함흥을 대표하는 표상이 되었다. 정치적 반대파를 제거하면서 생겨난 용어인 ‘지방할거주의’ ‘지방주의 온상’은 함흥지역의 정서가 되었다. 함흥 사람들은 어디가서도 손해를 보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함흥얄개’라고 한다. 동해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랑림산맥을 타고 내려오는 바람이 거세다는 의미에 ‘함흥내기’라고도 한다.  

위영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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