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휘의 시시비비] 사다리 ‘불태우기’

2023.05.03 06:00:00 13면

 

2002년 영국에서 출간된 장하준 교수의 명저 「사다리 걷어차기(Kicking away the ladder)」는 ‘선진국의 후진국 죽이기’를 별도로 정리한 책이지요. 보호무역이라는 사다리를 타고 높은 곳에 올라간 선진국들이 갑자기 자유무역을 주장하는 것을 개발 도상국들이 뒤따르지 못하게 사다리를 걷어차는 행동이라고 명쾌하게 비유한 이 책은 세계적으로 엄청난 반향을 불렀죠. 


원래 외국에서 ‘별장’이나 ‘저택’을 뜻하는 용어인 빌라(villa)는 한국에서 묘하게 변화했어요. 다세대·다가구·연립주택과 크게 다르지 않은 집합건물인데, 집장사들의 묘한 차별화 상술이 소비자들의 기호와 맞아떨어졌다고나 할까요. 주거환경에서 비싼 아파트와 큰 차이가 없는 빌라건축 붐은 우리 사회에서 지금도 실로 대단해요. 


빌라는 오피스텔 대비 전용률이 높고, 아파트에 비해 동일 면적대비 가격이 낮다는 이점이 있어요. 주차장이 넉넉하지 않은 단점을 빼면 그냥 살기에는 참 괜찮은 집 형태에요. 빌라는 무주택자들에게 아파트를 소유하기 위한 사다리처럼 기능해왔어요. 그 사다리의 가장 든든한 뼈대가 바로 우리나라의 독특한 임대제도인 전세(傳貰) 방식이지요. 


전세 빌라는 고정지출을 절약해 목돈을 모을 수 있는 이점이 있어요. 그런데 근년에 이 빌라 전세 제도가 그만 동티가 나고 말았네요. 아파트를 중심으로 집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으면서 소위 ‘빌라왕’이라는 희대의 사기꾼들에게 주로 젊은이들이 걸려들어서 벼랑 끝으로 내몰리는 비극이 벌어졌어요. 


빌라 전세 사기는 중간 단계에 있는 분양대행사와 갭투자자, 공인중개사 등이 소위 불법 리베이트라는 매개를 통해서 사기극의 배우 역할을 분담했어요. 감언이설(甘言利說) 실력이 프로급인 사기꾼들의 사탕발림 꾐수에 사회 경험이 부족한 젊은이들은 한번 걸려들었다 하면 빠져나갈 재간이 없었겠지요. 


인천과 강원도 일대에 500억대 의혹을 사고 있는 남모 씨, 수도권에 170억대 피해를 남기고 사망한 빌라왕 김모 씨, 인천에 100억대 피해를 남기고 사망한 청년 빌라왕 송모 씨…화성 동탄에서 약 250채의 범죄 의혹을 받는 부부 등 피해는 전국에서 연일 불거지며 무한 확산하고 있군요. 


정말 궁금한 게 있어요. 한 사람이 수백 채씩의 빌라를 주무르는 위험천만한 장난질을 칠 동안 정부 기관, 여야 정치권은 도대체 무엇을 한 건가요? 권력을 한 줌이라도 더 차지하려는 드잡이질에 빠져서 아예 눈감고 산 게 아닌가요?

 

전세 사기는, 어떻게든 집이라도 한 칸 마련하려고 발버둥 치는 젊은이들의 눈물겨운 사다리를 그냥 걷어차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빼앗아 불태워 없애는 만행이에요. 위정자들은 모두 이 악랄한 사건의 공범이나 마찬가지예요. 하루빨리 해결하지 못하고 ‘남탓’ 공방만 거듭할 양이면 모두 자리에서 내려오세요. 더 이상 국민 혈세 축낼 자격 없잖아요. 안 그래요? 

안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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