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숙의 프랑스 예술기행] 오귀스트 로댕과 오드센의 뫼동

2023.05.12 06:00:00 13면

 

왼팔을 턱에 괴고 무언가 골똘히 사색에 잠긴 남자. 고뇌하는 인간의 형상이 이처럼 고귀할 수 있을까! ‘생각하는 사람(Le Penseur).’ 오귀스트 로댕(August Rodin)의 조각상이다. 예순두 살에 완성한 작품답게 원숙미가 물씬 풍긴다.

 

 

이 유명한 작품의 제작자 로댕. 그는 신성불가침 시대 인간의 본능과 관능, 그리고 고통을 매우 적나라하게 표현했다. 한 시대의 예술을 이끈 거장이었지만 그의 어린 시절은 매우 초라했다. 근시로 인해 학습장애를 겪고 국어도 제대로 못하는 학습 부진아였다.

 

이런 그가 유일하게 흥미를 갖고 즐거워 한 것은 스케치. 그의 부모님은 열네 살 된 아들을 데생과 수학을 공부할 수 있게 파리의 특수학교에 입학시켰다. ‘작은 학교(Petite École)’라 불리는 이 학교에서 로댕은 훌륭한 스승들의 가르침을 받으며 조각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파리의 명문인 에꼴데보자르(미술대학) 콩쿠르에 세 번이나 낙방했다. 데생 점수는 넘쳤지만 조각 점수는 언제나 모자랐기 때문이다.

 

이런 그에게 행운이 찾아왔다. 당대 최고의 조각가 카리에-벨뢰즈를 만난 것이다. 로댕은 이 대가와 일하면서 그의 아틀리에에서 5년간 머물렀다. 이 협업이 끝나자 바로 벨기에 조각가 앙뚜안 판 라스부르와 함께 브뤼셀 왕궁에 문양을 넣어 장식하게 됐다.

 

 

서른일곱 살 때 제작한 ‘청동시대’는 그를 스타로 만들었다. 브뤼셀과 파리 살롱에 전시된 이 조각상은 대 히트를 쳤다. 프랑스 정부는 구리와 주석으로 된 이 거대한 조각상을 거금을 주고 사 들였고, 로댕에게 아틀리에까지 선물로 줬다. 사교계의 상류층은 로댕을 그들의 초상화가로 지정했다. 프랑스 정부는 높이 7미터, 무게 8톤의 거대한 ‘지옥의 문’을 주문했다. 바야흐로 로댕의 황금기가 시작됐고 주문은 쇄도했다.

 

성공가도를 달리는 로댕은 오드센 지방의 뫼동(Meudon)을 좋아했다. 이곳의 고요와 적막은 그에게 너무나 매력적이었다. 센 강가의 언덕들과 비탈길이 많고 강과 계곡 간 고도 차가 150미터나 돼 그림처럼 아름답다. 남쪽의 가장 높은 곳에는 뫼동 숲이 있고, 중턱에 파리가 파노라마처럼 한 눈에 들어오는 벨뷔가 자리 잡고 있다. 로댕은 여기서 애인 로즈 뵈레와 살았다. 일요일이면 그는 로즈를 ‘나의 농장주’라 불렀고, 그녀는 로댕을 ‘내 영감’이라고 짓궂게 대꾸했다. 천재 조각가가 작업을 하는 동안 그녀는 손수 요리를 했다.

 

뫼동은 프랑스 역사의 중심지로 시대를 막론하고 왕족과 귀족들의 로망의 땅이었다. 중세에 건축된 뫼동성에는 에땅프 공작부인, 로렌 추기경, 아벨 세르비앙과 루브아 후작 등 수 많은 귀족이 살았다. 17세기 말부터 18세기 초 황태자 몽셰뇌르가 이곳에 오면서 뫼동은 영광의 시간을 맞이했다. 지금 그 자취들이 우아하게 남아있다. 파리의 지근거리에 있는 뫼동. 몽파르나스 역에서 기차를 타고 달리면 10분에 도착한다. 로댕을 사모한다면 파리여행 때 이곳을 잊지 말고 꼭 들러보길 권한다.

최인숙 demol@kg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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