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숙의 프랑스 역사여행]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아작시오

2023.07.14 05:00:00 13면

 

‘불가능은 없다’는 유명한 말을 남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eon Bonaparte). 그가 죽은 지 어언 200년이 넘었다. 그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지만 살아있는 전설임은 분명하다. 매년 프랑스 일요신문이 공개하는 ‘프랑스인들이 좋아하는 역사인물 Top 10’의 선두주자는 어김없이 나폴레옹이다. 왜 그의 인기는 식을 줄 모를까. 프랑스에 최고의 영광을 가져다줬기 때문일까? 물론 그 이유도 클 것이다. 요즘처럼 가세가 기울어가는 프랑스에서는 그가 더욱 그리울 테니 말이다. 이 남자의 군사적 수훈도 중요하지만 그가 프랑스인들의 일상에 남긴 업적은 지대하다.

 

프랑스에서는 주소 하나만 들고 택시를 타면 못 찾아갈 곳이 없다. 주소를 손에 들고도 전화를 하고 또 해야 겨우 목적지를 찾는 우리와 사뭇 다르다. 이 편리함은 나폴레옹이 ‘거리에 번호 매기기’를 창안한 결과다. 쓰레기 수거 역시 프랑스는 18세기부터 실시했다. 이 또한 그의 아이디어였다. 어디 그뿐인가.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설립하여 무상교육을 실시하고, 학사학위를 만들고, 최고의 훈장 레지옹 도뇌르(Légion d'honneur)를 고안한 것도 그였다.

 

사방팔방의 파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제1의 명소 개선문 역시 그의 발명품이고, 방크 드 프랑스(프랑스 은행)도 마찬가지다. 법을 집행하기 위해 각 지방에 도지사를 임명한 것 역시 그였다. 이는 나폴레옹코드(민법)라고 불리는 법률의 기원이기도 했다. 심지어 그는 프랑스인들을 화해시켜 사회를 평화롭게 하고자 1801년 교황과 협정을 맺었다. 이로 인해 가톨릭은 더 이상 프랑스 국교가 아닌 ‘대다수의 종교’가 됐다. 이렇게 빚진 게 많은 프랑스인들이 어떻게 나폴레옹을 잊을 수 있겠는가.

 

발명왕 나폴레옹. 그는 1769년 8월 15일 코르시카 남부 아작시오에서 태어났다. 이 섬이 프랑스령으로 바뀐 지 1년 후의 일이었다. 이곳의 변호사이자 정치 기회주의자였던 카를로 보나파르트의 넷째 아들이었다. 보나파르트는 코르시카 귀족의 부유한 가문이었지만 프랑스 귀족들에 비해서는 가난했다.

 

제노바 혈통의 이 가문은 코르시카에 15세기 후반 정착했다. 이 역사는 아작시오 구시가지 좁은 골목에 있는 녹색 덧문의 나폴레옹 생가에 잘 나타나 있다. 휴양지와 인접한 아작시오의 세련된 도로 그랑발을 거슬러 올라가면 언덕 꼭대기에 화강암 블록의 카조네(Casone) 동굴이 있다. 여기서 소년 나폴레옹은 자신의 미래를 읽고 상상했다. 큰 계단 꼭대기에 이각모를 쓴 나폴레옹의 동상과 그의 주요 업적들이 새겨진 돌이 있다.

 

아작시오에서 그는 영혼불멸이다. 그의 얼굴과 이름은 염소 치즈에서부터 여기저기 보인다. 그는 여전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나폴레옹은 여기서 예수처럼 잘 알려져 있다!”라고 한 행인은 말한다. 매혹적인 인물로 “강한 힘의 상징”이라고 토산품 가게의 한 고객은 거든다. 그는 역사적 영웅이지만 팝 문화와 패션의 오브제로도 으뜸이다.

 

최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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