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갑의 난독일기(難讀日記)] 쫄지 말자

2023.08.23 06:00:00 13면

 

아이들이 독립했다. 세 아이 모두 오롯이 홀로 섰다. 아이들이 떠난 둥지는 겨울들녘이다. 씨앗과 줄기와 열매는 떠나고 냄새만 남았다. 겨울들녘의 냄새는 춥고 쓸쓸하다. 보듬는 냄새마다 어김없이 명치끝에 박힌다. 나는 차마 냄새를 떨어내지 못하고 도리질한다. 그때마다 길게 누운 그림자가 내게 묻는다. 겨우살이 준비는 했어? 나는 우물쭈물 대답을 찾지 못한다. 발끝만 보며 아득바득 살아온 내게 겨울을 날 준비라니. 식량은커녕 땔감조차 옹색하다. 어쩌자고 이렇게 살았을까. 어디를 둘러 봐도 겨울들녘엔 내 그림자뿐이다. 생계형 글쟁이로 살았다고? 시답잖은 소리. 뿌리내린 나무 하나 없는 글쟁이에게 겨울바람을 견뎌낼 기둥은 없다.

 

그래서겠지. 겨울들녘을 가르는 바람소리가 귓속을 울린다. 삐이이이. 종일 울려대는 소리는 이제 그만 들녘을 떠나라는 경고음 같아 숨이 가쁘다. 뒷목이 뻣뻣해지면서 어지럽다. 뜨거운 열기가 경동맥을 타고 머리로 치솟는다. 눈앞이 흐릿해서 걷다가도 주저앉기 일쑤다. 두 달째 이 모양이다. 동네병원에서는 경추디스크라고 하였지만 대학병원의 판단은 달랐다. MRI 판독 결과 경추불안정증이 의심된다고 하였다. 하지만 오랜 검사 끝에 얻은 결론은 ‘해당 없음’이었다. 신경과에서도 이비인후과에서도 끝내 원인을 찾지 못했다. 꼴이 이렇다보니 아파도 아프다고 말하기가 저어된다. 뿌리 내린 나무 하나 없는 글쟁이에게 쓰러질 권리란 없다.

 

없으면 버텨야 한다. 버티고 살아내야 한다. 쓰러질 권리와 넘어질 자유조차 없음이 나만의 일은 아니다. 봄과 여름과 가을을 보낸 지금, 겨울과 맞설 준비가 되지 못한 사람은 나 하나가 아닐 테니까. 그런 점에서 ‘인생은 각본 없는 드라마’란 말은 틀렸다. 누구에게나 소망하는 각본은 있다. 다만 그가 꿈꾸는 각본대로 살아지지 않을 뿐이다. 며칠 전에 TV에서 보았던 그 무명 선수만 해도 그렇다. ‘최강야구’라는 예능 프로그램인데 출연진 대다수가 은퇴한 야구선수들이다. 은퇴를 하였음에도 시청률이 보장되는 것은 쟁쟁한 그들의 이름값 때문이다. 한국 프로야구를 대표하는 출연진들 앞에서 무명 선수는 말 그대로 ‘듣보잡’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야구선수가 아니다. 학교를 다닐 때도 야구선수였던 적이 없다. 그런 그가 최강야구의 팀원이 된 것은 공개오디션을 통해서다. 당당히 뽑혔지만 그는 늘 후보 선수다. 실력으로나 관록으로나 그보다 뛰어난 투수는 많다. 그런 그에게 드디어 감독이 기회를 준다. 고척 돔구장 마운드에 그가 오른다. 16,000 관중이 환호한다. 잘 던지고 유명한 투수라서 보내는 박수가 아니다. 닮은꼴에게 보내는 진심어린 갈채다. 그도 관중도 TV를 시청하는 나도 듣보잡이긴 마찬가지다. 만년 후보인 것도 무명인 것도 꼭 닮았다. 닮아서, 그에게 보내는 박수와 함성은 온전히 관중과 나 스스로에게 보내는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는 아웃 카운트 하나밖에 잡지 못하고 마운드를 내려간다. 볼넷과 몸에 맞는 볼의 연속으로 밀어내기 점수를 헌납한 뒤였다. 그와 관중과 내가 꿈꾸는 각본은 결코 아니었다. 그렇다고 탓하거나 좌절할 일 또한 아니다. 살아내는 일이 어디 각본대로 이뤄지는 게 있던가. 관중들이 그렇듯이, TV를 시청하던 나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격려의 박수를 보냈다. 그리곤 그와 관중들을 향해 마음속으로 외쳤다. 기죽지 말자. 기회는 반드시 다시 온다. 옥에서 풀려난 이순신에게 열두 척의 배가 남았듯이, 우리에게는 아직 겨울이라는 계절이 남아있으니까. 그러니 아파도 아프다고 말할 수 없는 사람들아. 쫄지 말자.

고향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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