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숙의 프랑스 역사산책] 포로로 전락한 나폴레옹 1세와 그의 무덤

2023.09.14 06:00:00 13면

 

세계를 정복한 나폴레옹. 그에게 최후의 날이 찾아왔다. 1815년 6월 18일 벨기에의 워털루 전투에서 그는 영국과 프로이센의 연합군에게 패배했다. 천하의 나폴레옹 시대는 그만 막을 내렸다. 포로가 된 그는 남대서양의 작은 섬 세인트헬레나로 유배를 떠나야 했다. 그는 제라늄 계곡이 있는 롱우드 하우스에 발을 디뎠다.

 

그의 망명 생활은 결코 쉽지 않았다. 건강은 악화되고 성격 또한 요동쳤다. 6년간의 이 생활은 1821년 5월 5일 그가 생을 마감함으로써 종지부를 찍었다. 황제는 “만약 영국인들이 내게 조금의 흙을 거부하고 내 시체를 추방한다면 코르시카의 아작시오 대성당 조상들 곁에 묻히길 희망한다.”라는 말을 남겼다. 다행스럽게도 영국인들은 그가 섬에 묻히도록 허락했다. 5월 9일 황제의 장례식이 치러졌고 영국 수비대는 그에게 무기를 선물했다. 하지만 프랑스인들과 허드슨 로웨 주지사는 그의 무덤에 새길 비문을 놓고 옥신각신했다. 결국 이들은 합의하지 못했고 나폴레옹은 벌거벗은 돌 아래서 쉬어야만 했다.

 

 

그로부터 20년의 세월이 흘렀다. 나폴레옹 전쟁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후유증은 어느 정도 진정됐다. 제국의 팽창과 나폴레옹에 대한 향수가 모락모락 피어났다. 루이 필립 국왕은 나폴레옹의 인기를 이용하기 위해 영국인들에게 그의 시신을 송환해 달라고 간청했다. 그리고 황제를 모실 장소를 물색했다. 위인들이 묻히는 팡테옹, 에투알 개선문 등이 물망에 올랐다. 그러나 필립왕은 앵발리드(Invalides)를 낙점했다. 프랑스의 황제인 나폴레옹을 위해 아름답고 웅장한 무덤을 만들기 위해선 군사 역사와 관련 있는 상징적인 곳이 필요했다.

 

 

앵발리드는 루이 14세 시대 건축된 것으로 전체 이름은 국립 앵발리드 호텔이다. 이는 큰 안뜰 주위에 조직된 건물들의 집합체다. 많은 금박들이 박힌 앵발리드 관(館)은 왕이 옛 군인들을 수용하기 위해 그의 초대 건축가이자 감독관이었던 아르두앵-망사르(Jules Hardouin-Mansart)에게 짓도록 했다. 그는 병사와 부상자들을 위해 생-루이 데 앵발리드라고 불리는 성당을 짓고 이 성당에 부속된 예배당은 왕실의 미사를 위해 만들었다. 그 예배당은 높이 107미터의 황금빛 실루엣이 하늘 높이 솟아 있는 웅장한 돔으로 덮여 있다. 이 돔은 에펠탑이 세워질 때까지 파리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고 프랑스 혁명기는 전쟁의 신 마르스의 신전이 됐다.

 

 

그 돔 아래 머물기 위해 나폴레옹의 관은 몇 주간의 여행 끝에 파리에 도착했다. 황제의 유언대로 모국으로 돌아온 것이다. 1840년 12월 15일 국가 장례식에서 나폴레옹 1세의 관은 아직 무덤이 완성되지 않아 인근 예배당에 안치됐다. 돔 아래 황제의 무덤을 수용하기 위해 건축가 비스콩티는 중요한 발굴 작업을 수행했다. 나폴레옹 1세의 시신은 마침내 1861년 4월 2일에 그곳에 안장됐다. 프랑스의 황제 나폴레옹은 지금 센 강가에서 영원한 안식을 취하는 중이다.

최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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