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영금의 시선] 아버지의 의료일지(1)

2024.01.15 06:00:00 13면

 

아버지는 1936년 음력 5월 13일 양(량)강도 후창군에서 태어났다. 양강도는 압록강, 두만강을 경계로 중국과 접해 있어 양강도라 부른다. 어머니 고향은 동해안에 위치한 함경북도 어랑군이다. 두 분은 일제강점기 중일전쟁이 한창일 때 부모님을 따라 두만강, 압록강을 건넜고, 신중국에서 사회주의 실험을 하던 격변의 시대 만났다. 그리고 1960년대 중국에서 일어난 문화대혁명시기 어린 두 아들과 두만강을 건너 북조선으로 갔다. 조선족 자치주인 연변에서는 북한을 북조선이라 부른다.

 

아버지는 함경남도에 있는 고원탄광(수동구 장동)으로 배치 받아 얼마동안 노동자로 일했다. 의사를 했다는 증인을 찾는데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3명의 증인이 있어야 하는데 2명 밖에 찾지 못했으므로 속성으로 의사시험을 보았다. 속성 시험을 보면 준의사 자격을 주었다. 준의사는 의사, 간호사 중간에 위치한다. 당시는 의사와 준의사 구분이 명확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후에 의사가될 기회가 있었는데 그냥 준의사로 남았다.

 

병원에서 학위나 학벌은 중요하지 않고 진단과 처방을 잘하는 의사가 존중받는다. 진단과 처방은 즉시 효과로 나타나기 때문에 기술을 터득하지 않으면 학위가 있다 할지라고 지속하기 힘들다. 환자를 진단할 때 먼저 망진(望診)을 한다. 망진은 환자의 눈과 얼굴, 혀, 몸 상태를 통해 병을 진단하는 것이다. 상태를 보고 수술 할 것인지, 큰 병원으로 이송할지도 결정한다. 아버지는 이러한 진단과 처방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아버지 전공은 산부인과이다. 학회에 발표할 정도로 산부인과에서 아버지 의술은 소문이 났었다. 규모가 있는 병원에서도 일하셨고 규모가 작은 병원에서도 일했다. 규모가 작은 병원에서는 내과, 외과, 실험실, 산부인과 등 여러과를 교차하면서 진료를 보았다. 퇴직 전에는 말단 기관인 진료소에서도 일하셨다.

 

아버지 재직기간 지역을 세 번 이동했다. 병원은 대체로 주민지대와 떨어진 산 아래, 또는 산 중턱에 자리했다. 지역을 이동할 때마다 우리집은 늘 병원 가까이에 있었다. 병원 울타리안에 있을 때도 있었다. 그래서 탄생과 죽음이 공존하고, 병으로 인한 고통을 눈앞에서 목격하며 살았다. 규모가 큰 수동병원 건물 뒤에는 외부와 격리된 결핵병동이 있다. 집은 소속단위 직장에서 배정해 주는데 미처 마련하지 못해 남의 집 웃방살이를 하기도 했다.

 

아버지는 사회 인정에 대한 욕구가 강했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1990년대 이전까지만해도 아무리 의술이 높아도 넘을 수 없는 한계가 있었다. 아버지가 1960년대 문화대혁명을 피해 북조선으로 들어온 사람이라는 것과 뛰어난 의술외에도 존재하는 계급이라는 서열이 있었다. 의술보다는 계급이 중요했던 시기 아버지는 그것을 극복하려 눈물겨운 노력을 했다. 피할 수 없는 상황을 운명으로 믿고 살아내기는 결코 쉽지 않은 여정이었다.

위영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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